돈대의 고장 강화, 이것만은 바로 알자
돈대는 조선시대에 돌로 쌓아서 만든 일종의 경계초소인데 우리나라 어디에도 강화도만큼 돈대가 많은 지역은 없다. 17세기에 집중적으로 축조된 돈대는 현재 쉰 두 개가 전해지는데 대부분 숙종 대에 쌓았다. 강화도를 최고의 보장지(保障地), 즉 변란을 당했을 때 왕조가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인식한 숙종은 강화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방어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서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이 할아버지이고 청의 수도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을 아버지로 둔 숙종은 청나라의 위협에 남다른 소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만반의 대비를 하고자 했을 것이다. 효종 대에 이미 진(鎭)과 보(堡)라는 경비부대를 배치해놓고 있던 강화도이지만 섬을 빙 둘러싸는 50여 개의 돈대를 새로 설치하여 100여 km에 달하는 해안선에 빈틈없는 경계망을 추가로 구축했다.
그래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병자호란 때 갑구지 방어에 실패하면서 적의 상륙을 허용해 크게 당했던 트라우마가 있는지라 동쪽 해안의 돈대와 돈대 사이는 외성으로 연결해서 막아 버리고 강화유수부의 치소와 왕이 머물 행궁이 있는 강화읍에는 7.2km에 달하는 부성(府城)을 새로 쌓았다. 해안선을 따라 설치된 돈대를 제1방어선으로 삼고, 섬 외곽 요처마다 배치되어 있는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를 제2방어선으로, 강화읍 북산과 남산 그리고 견자산을 잇는 유수부성(留守府城)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3중 방어망을 구축한 강화도는 이로써 왕조의 굳건한 보장지처(保障之處)가 되었다.
강화도 방어의 제1선에서 조기경보시스템 역할을 했던 돈대들이 만들어진지 350년이 돼가는 이 시점에서 돈대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해안방어 유적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코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 이에 맞추어 그동안 돈대에 대해 잘못 알려져 온 것들, 왜곡된 채 유통되는 내용 몇 가지를 적시하고 바로 잡고자 한다.
들쭉날쭉한 돈대 개수 정확히 몇 개인가
강화군에서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돈대의 개수는 53개이고 돈대 지표조사를 했던 육군박물관은 54개라고 주장한다. 52개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필자가 보기에 54개는 70점, 53개는 낙제점이다. 왜 그런지 돈대 구축의 이력을 한 번 따져보자.
◆1679년 48개 돈대 설치
◆1696년(?) 검암돈(黔巖墩) 추가설치
◆1718년 빙현돈(氷峴墩) 추가설치, 양암돈, 갈곶돈 폐지
◆1719년 철북돈(鐵北墩) 추가설치
◆1720년 초루돈(譙樓墩) 추가설치
◆1726년 작성돈(鵲城墩) 추가설치
◆1872년(?) 용두돈(龍頭墩) 돈대지정
육군 박물관에서 제시하는 54개는 1718년에 폐지한 양암돈과 갈곶돈을 포함시킨 숫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돈대는 기록이 잘못 되었다던가 자연 소멸되어 잊혀져버린 돈대가 아니라, 선두포 뚝이 축조되면서 전술적 가치가 없어지자 당시 강화유수 권성(權晟)이 폐지할 것을 상신하였고 숙종의 재가를 받아 당대에 일부러 없애버린 돈대들이다. 이 일련의 과정 또한 존중되어야 할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할진데 숙종의 쓰레기통까지 뒤져서 돈대 숫자를 늘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사를 대하는 자세가 좀 더 진지해져야 한다.
강화군이 내세우는 공식 돈대 개수 53개에도 폐지되어 사라진 두 돈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입해 놓았다. 그리고 신미양요(1871년) 이후에 돈대로 지정된 용두돈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강화군의 결정적 실착은 바로 이 용두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현장에 실체가 존재하는 돈대인데 카운트를 하지 못하는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강화군에서 2003년에 발간한 '강화 옛 지도' 속에 그 근거가 잘 담겨있다.
이 지도책 40쪽을 보면 1872년에 제작한 강화부 전도가 실려 있다.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이 지도는 전국 군현지도와 함께 만들어진 강화의 대표적인 대형지도인데 이 지도에 처음으로 용두돈(龍頭墩) 표기가 등장한다. 한 해 전 신미양요 격전지였던 이곳의 전술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군부가 외성의 성두(城頭) 부분이었던 곳을 돈대로 격상시켰음을 알 수 있다. 기존 돈대와는 근본적으로 형태가 다르지만 실전을 치룬 軍에서 이곳을 돈대로 쓰겠다고 하면 돈대인 것이다. 이것을 두고 21세기 강화군에서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다. 용두돈을 돈대 리스트에 추가하고, 폐기처분한 두 돈대는 다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면 ‘52’라는 숫자가 나올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시대의 강화도 돈대는 전부 52개이다.
돈대를 만든 사람이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맞나?
돈대 앞에 세워놓은 설명문을 보면 1679년의 48개 돈대를 강화유수 윤이제가 만든 것으로 나온다. 어떤 사료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다. 마치 지역 단체장의 업적 내세우듯이 해 놨는데 강화에서 진행된 사업이니 강화유수가 주관했을 거라는 지레 짐작인가? 관련 사료의 연구 검토가 제대로 안되어 있는 것 같다.
강화도 해안의 돈대축조사업은 숙종의 외종숙이자 병조판서이고 어영대장을 겸하고 있던 식암 김석주(息庵 金錫胄)가 숙종의 명을 받아 기획하고 추진했다. 입지타당성 조서보고서인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과 공사계획서, 시방서에 해당하는 강도돈대설축절목(江都墩臺設築節目)을 작성하여 올리는 등 의사결정과정을 주도하였으며 휘하의 어영청 병사들을 직접 인솔하여 공사현장에 투입하고 어영중군 윤천뢰에게 현장 총감독을 맡기는 등 프로젝트 전 과정을 이끌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역 책임자인 강화유수가 두 손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강화도를 보장지로 만드는 일은 왕사(王事)라고 했다. 이는 지역이나 정파나 부서를 초월하여 거국적으로 힘을 모아 이룩해야 하는 일인 만큼 음으로 양으로 많은 지원을 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공사의 진척상황을 보고하는 등의 업무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당시 상황이 이러했는데 돈대 축조를 강화유수 윤이제가 했다고 하면 아마 지하의 윤이제 본인이 더 펄쩍뛰며 손사래를 치지 않겠는가? 후대의 왜곡이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는 훌륭한 선대를 욕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강화도 돈대는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이 만들었다고 해야 역사성, 상징성에 부합하는 표현이라고 본다. 이걸 좀 더 구체적, 사실적으로 기술해야 한다면 " 1679년 강화도의 돈대축조사업은 숙종의 명을 받은 병조판서 겸 어영대장 김석주가 주도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8개 돈대를 정말 40일 만에 만들었을까?
돈대 48개를 40일 만에 만들었다는 얘기는 강화에서 몇 십 년 동안 정설이었다. 돈대 관련 자료나 돈대 앞에 세워놓는 설명판에 공사 40일 만에 완공했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김석주가 올린 강도돈대설축절목에 승군 8,000명을 40일 내에서 사역시킨다는 구절이 있고, 18세기 중반에 전국 읍지를 엮어서 만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40일 완축(完築)”이라는 과장된 기사가 들어가 있는데 이런 것들을 근거로 삼았는지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포크레인 기사로 50년 가까이 각종 건설현장을 누볐던 친구가 이 얘기를 듣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혀를 찬다. 사람을 아무리 많이 투입해도 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데 사방에 흩어져 있는 48개 돈대를 어떻게 40일 만에 만들 수 있냐며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 적이 있었다.
최근 강화 유적의 설명판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교체되면서 돈대의 설명판도 바뀌기 시작했는데 이 신형 설명판에는 80일 만에 돈대를 쌓았다고 나온다. 이제야 잘못 되었음을 알았는지 40일을 폐기하고 대폭 수정했다. 새로 내세운 80일도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산출한 결과로 보이지만 이것도 역시 틀렸다. 돈대공사의 전반기를 담당했던 승군(僧軍)은 연간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군역일수가 40일이다. 승군과 교대하여 후반기 공사를 맡았던 어영청 소속 향군들의 번상(番上)일수도 40일이다. 정해진 날짜를 꽉 채웠을 테니 이 둘을 합하면 80일이 나온다. 하지만 1679년 3월 2일 승군이 투입되기 훨씬 이전인 1678년 11월부터 이미 돌뜨기와 다듬기 작업을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품삯을 받는 민간인 석공 400명, 조공(助工) 950명, 대장장이 50명을 대거 동원하였다.
비변사등록의 기록을 보면, 돌뜨기 작업을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인 1678년 11월 18일 병조판서 김석주는 돈대공사를 시작하면서 고유제를 지내겠다며 숙종에게 결재를 받는다. 고유제(告由祭)는 요즘 식으로 해석하면 기공식인 셈이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1679년 5월 13일에 김석주는 돈대공사가 며칠 내에 끝날 것임을 숙종에게 보고한다. 강화도의 48개 돈대는 구상, 검토, 기획과정에 소요된 기간을 제외하고도 현장 작업기간만 6개월이나 걸린 대공사였다.
돈대 명칭의 의미와 변화
잘 알려진 돈대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자. 초지돈대(草芝墩臺), 덕진돈대(德津墩臺), 광성돈대(廣城墩臺), 갑곶돈대(甲串墩臺), 후애돈대(後崖墩臺)... 우리는 지금 이렇게 부르고 또 쓰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조선시대 기록 어디에도 이렇게 쓴 경우가 없다. 한결같이 초지돈(草芝墩), 덕진돈(德津墩), 광성돈(廣城墩), 갑곶돈(甲串墩), 후애돈(後崖墩)이라고 썼다. 고유명과 돈대가 결합할 경우에는 같은 뜻의 글자 돈(墩)과 대(臺)를 중복 사용하지 않고 墩자 하나만 붙여 썼다. 350년을 이어 온 소중한 유산이 왜 우리 대에 와서 변질되고 있는지 안타깝다.
돈대 명칭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돈대가 어떤 입지에 세워졌는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돈대가 위치한 장소가 어떤 지형인가를 보여주는 경우인데 곶(串)으로 표기되는 ~고지, ~꼬지, ~구지 지형이다. 바다 쪽으로 뾰죽하게 돌출된 지형으로 리아스식 해안인 강화도의 해안은 '곶'지형으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오랜 세월 꾸준히 진행되어 온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몇몇 돈대 명칭에 그 흔적이 남아있어 곶지형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분오리(곶)돈, 석각(곶)돈, 무태(곶)돈, 구등(곶)돈, 불장(곶)돈, 천진(곶)돈, 용당(곶)돈 등이 있는데 진즉부터 (곶)자를 빼고 사용하는 돈대들이다.
송곶돈, 미곶돈, 북일곶돈, 장곶돈에는 아직도 '곶'자가 살아있다. 이 유형의 돈대에 가보면 '과연'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바다 쪽 전망이 좋다.
다음은 나루(津)나 포구(浦)에다 설치한 돈대들이 있다. 인화(포)돈, 망월(포)돈, 낙성(포)돈, 옥포돈(玉浦墩), 용진돈(龍津墩), 덕진돈(德津墩) 등이 있는데 한 때 인적 물적 이동이 빈번했던 수상교통의 요지라고 보면 된다.
바위 이름도 돈대명에 많이 사용했다.
섬암돈(蟾巖墩) - 두꺼비 바위
검암돈(黔巖墩) - 검은 바위
굴암돈(屈巖墩) - 굽은 바위
삼암돈(三巖墩) - 세 바위, 삼각바위
광암돈(廣巖墩) - 너른바위
휴암돈(鵂巖墩) - 수리부엉이 바위
원래 정자(亭子)가 있던 자리에 돈대를 세우고 이름을 그대로 쓴 경우도 있다. 제승(정)돈, 오두(정)돈, 망양(정)돈, 가리(정)돈, 적북(정사)돈이 있고 작은 섬(島) 위에다 만든 돈대들도 있다. 화도돈(花島墩), 소우도돈(疎雨島墩), 동검도돈(東檢島墩) 등이 그것인데 현재 화도돈과 소우(도)돈은 간척으로 인해 육지화 되었다.
돈대 명칭이 변경되거나 잘못 쓰이고 있는 경우도 알아보자
갑곶돈(甲串墩) - 최초의 명칭은 제물돈(濟物墩)이었다. 인천에서 이동 배치된 부대 제물진(濟物鎭)의 영내에 있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지만 갑곶의 높은 지명도를 당해내지 못하고 일찌감치 갑곶돈으로 바뀌었다.
좌강돈(左岡墩) - 이 돈대도 용진진(龍津鎭) 영내에 있어서 용진돈이라고 명명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18세기 중반 여지도서에서부터 좌강돈으로 바뀌어 굳어졌다.
동검북돈(東檢北墩) - 원래 동검도돈(東檢島墩)이다. 동검북돈이란 명칭은 여지도서에 처음 등장하는데 도(島)자가 북(北)자로 뜬금없이 바뀐 이유를 모르겠다. 읍지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오자로 보인다. 이후에 나온 어떤 지도에도 동검북돈이란 표기는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원래의 이름 동검도돈을 찾아줘야 할 돈대이다.
선수돈(船首墩) - 돈대 명칭을 잘못 쓰고 있기로 유명한(?) 돈대이다. 진짜 이름은 검암돈(黔巖墩)이다. 한 때 송강돈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던 돈대인데 와중에 본래의 이름까지 잊혀져가고 있다. 밴댕이포구로 유명한 선수포구의 뒷산에 있다고 주변에서 그렇게들 쉽게 부르는 모양이다. 돈대들이 보통 한 두 개 정도의 속칭, 별칭을 가지고 있긴 하나 이 돈대의 경우는 안내 표지판이나 돈대 설명판에까지 공식명칭으로 사용하면서 사실(史實)을 왜곡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역사유적을 무슨 밴댕이 마케팅 하듯 할 셈인가 하루 빨리 본래의 이름 검암돈으로 바꿔야 하겠다.
미루지돈(彌樓只墩) - 원래 이름이 미곶돈(彌串墩)이다. 순한글 ‘미꾸지‘를 한자로 바꾼 것이 미곶(彌串)이다.미루지는 이도 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명칭으로 근래에 만들어진 말이라 당연히 기록이나 근거도 없다. 원래의 명칭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고려산 낙조봉 아래에 미꾸지 고개가 있는데 미꾸지는 산줄기 한 가닥이 삐죽 나온 곳을 일컫는 일반명사라 다른 지방의 지명에서도 가끔 나오는 말이다.
맺는말
강화는 ‘역사의 고장’, ‘지붕 없는 박물관’ 등의 수식어에서 보듯 역사문화유산이 많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넘치는 고장이다. 최근에는 돈대를 중심으로 하는 해양관방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움직임까지 있어 세간의 관심이 더해지는 분위기인데 돈대 하나만 보더라도 잘못되어 있는 것, 왜곡 변질되고 있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것들을 손보지 않고서는 문화유산의 진정성(眞正性) 즉 원래 가치의 보존이나 재현이 어렵게 되고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세계문화유산은 커녕 국내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떨어지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의 복원이 원래의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는 바람에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한 번 실패했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문화유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탐구와 노력은 물론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반인들의 관심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강화에서는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 하지만, 알고 보면 심각한 오류나 왜곡을 내포하고 있는 돈대유적의 제반 문제점들을 들춰 내 보았다. 강화도 돈대가 완벽하게 제 모습을 갖추는 일에 이 글이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
P.S
필자의 이 글은 강화에서 2020년 12월 6일에 발행된 연간지(年刊誌) 강화시선 12호에 게재되었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