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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채 유적지 (강화군청 주차장 부지) 발굴 현황
* 이 글은 살채 유적지 발굴 현장 바로 곁에 살고있는 죽마고우 이현일이 페이스북과 강화사랑 홈페이지에 게재한 내용인데 여기다 全載합니다.
사진1 (사라진 강화도 살채터에서 별효사청 동영으로 추정되는 발굴현장)
비공개인 현장을 공개하는 이유는 일부 유적지 발굴이 정치적 또는 경제적 가치 등의 이유로 현장을 덮는 예가 빈번해 발굴로 들어난 유적지 흔적의 중요도를 감안, 주민의 일원으로 공론화 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쓰이길 원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위 사진은 1876년(고종13년) 강화도 조약 당시 일인에 의해 견자산 중턱에서 3컷으로 나눠 찍은 강화읍 전경을 재구성한 사진입니다.
이번 주차장터 발굴 조사는 고려와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나 고려의 유적지 흔적은 아래의 이유로 찾기 어려울것으로 보입니다.1231년(고려 고종19년) 시작한 몽고와의 전쟁 후 1259년 패하면서 화의 조건으로 대 몽고전의 보류였던 궁성, 중성, 외성등 토성과 고려궁을 포함 한 부속 관청들도 헐렸고, 몽골군사들은 도성내의 민가까지 불을 질렀다고 하니 753년이나 지난 현 시점에 고려의 유적지 찾기는 욕심인 듯 싶지만 기대는 해야겠지요.
● 이후에도 조선시대 들어와 1636년 청나라와의 전쟁 "병자호란"
● 외규장각 약탈로 유명한 "병인양요"
● 미 해병대의 "신미양요" 등의 전쟁에 위한 파괴와
● 대한민국 근대사의 최대 치욕으로 기록된 일본에 의하여 강제당한 강화도조약. 1876년 (고종13) 일명 한.일 수호조약 이후 일본의 무차별적인 문화파괴도 강화도 내 조선시대 유적지의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게 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때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인에 의해 촬영된 3장의 사진을 근거로 정조대왕 때 생겨 19세기 말까지 존재한 것으로 기록된 강화도 진무형 소속 특수 부속부대인 "별효사청 동영"을 재구성한 향토사가 김보형님의 블로그(https://kanghwalove.tistory.com)에 "강화 진무영의 특수기동대 - 별효사(別驍士)" 편을 참고 할 수 있어 유적지 발굴현황을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아래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별효사청으로 추정되는 유적지 발굴현장 그림을 싣었으니 현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사진3 (별효사청/용동궁 부지 파노라마 사진)
위 사진은 별효사청 전체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건물내 일면입니다.주춧돌과 안뜰에 떨어지는 빗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주춧돌 밖으로 설치하는 장방형의 기단.井자형 우물과 빗물을 건물밖으로 내 보내기 위한 수채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그림의 뒷편이 북쪽이고, 우물의 위치로 보아 우축의 도로변 축대 속으로 깊이 어어져 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로부터 4개의 번호를 부여하여 아래에 그림을 추가하고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현장을 살펴보면 견자산의 일부가 땅 속에 커다란 바위형태임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건물을 형성할 때 붙박이 바위를 가공하여 주춧돌이나 기타 건물을 세우는데 기초로 사용한 듯 보입니다.
위 사진은 그림 3의 1-1번 포인트인데 커다란 바위들로 기초를 만들어 그 위에 주춧돌을 얹혀 건물을 세우고, 건물로 빗물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내 전체 둘레를 계단형 기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초로 쓰인 바위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군요.
위 사진은 사진3의 1-2 건물내 시설로 우물 같이 보이는데 기단 아래 두줄의 돌로 물길을 만들고 중간에 평형 돌을 덮어 돌다리를 놓은 모습도 보입니다. 우물 덮개 같은 네모난 평석이 우물 곁에 놓였는데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알수 없군요. 주변에 물을 유도하는 시설들이 우물쪽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빗물이나 건수를 모으는 우수정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어린시절 발굴현장에서 20여m 위에 "견자산 우물"이란 명칭의 생수 우물터가 있었는데 우물 밑에 커다란 바위가 흐르고 있어 더 깊이 팔 수 없었던 우물이라 바위사이로 물이 솟아 오르는 샘물을 두래박으로 길어 마시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도 같은 형태로 샘물이 솟을 듯 보입니다.
위 사진은 빗물이나 건수가 위쪽의 건물아래 기초부분으로 유입될 것을 가정하여 기단 밑으로 자연배출하도록 만든 수채구멍으로 보입니다. 우물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서 언급한 우물이 일반적인 우물이 아니고 샘물을 임시로 가두어 분배하는 기능으로도 쓰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위 사진은 건물의 대문쪽 끝인 듯 한데 내부의 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수채구멍으로 보입니다.아래에 언급할 예정이나 본건물 밖의 여러 부속 기능처를 따라 진흙으로 만든 오지관을 연결하여 별효사들이 타는 말을 관리하는 곳까지 물길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안뜰 여기저기 보도블럭 형태의 흙운모 판석이 깔려있는데 병사들의 보행 경로를 따라 디딤돌로 쓰였거나 뜰 바닥 전체를 판석으로 덮어 타일바닥 형태의 깔끔한 보양이 아니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진 위쪽을 자세히 보면 붙박이 바위가 살짝살짝 보이는데 그 바위를 이용해 기초와 주춧돌을 놓아 튼튼한 구조의 건물임을 짐작하케 하는데 앞부분 수채구멍 밑으로 평석을 깔아 흙이 패이지 않토록 막은 모습도 보입니다.
앞서 설명한 건물로 유입된 빗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수채구멍 밖까지 흙운모의 판석을 잘 정돈되게 깔아 보행의 원활함과 물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는 정교한 배려가 돋보이고, 말에서 내리기 쉽게 노둣돌로 쓰인듯 장석이 보이는군요.
위 사진은 첫 그림의 2번 포인트로 본건물 앞 한 단계 아래에 위치합니다. 조개가루로 만든 회로 방수처리된 작은 상자형 방인데 위 쪽으로 물의 유입경로가 있고 아래에 오지관을 사용 물을 배출하는 구조입니다. 용도가 불문명하지만 말을 목욕시키기 위한 시설이 아니였나 싶군요.
위 사진은 본 건물의 두 단계 아래에 위치한 방수처리된 욕조형 시설인데 옆에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물길이 있었던듯 흙색이 다른 일자형 시설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물길을 덮은 흙 색깔이 검은 것으로 보아 거름끼가 있는 밭흙으로 메우거나 물의 흐름 거듭되는 하수라인의 속성상 라인을 따라 폐수로 오염된 썩은 흙색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위 그림과 같은 높이의 위치 동쪽으로 있는 같은 구조의 방수형 욕조입니다. 하단에 작은돌로 기초를 만들고 위에 석회로 방수 테두리를 만들었군요. 아마도 말이 마시는 물통의 시설이 아니였을까 싶군요.
본 건물의 맨 하단에 위치한 시설로 허물어진 기초석이 보이고 아래에 웅덩이가 보이는데 주변 흙색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특색인데 말의 배설물을 모아두던 곳일까요?
위 사진에서 웅덩이를 확대한 사진입니다. 인공적인 웅덩이는 확실하고 흙색도 확연히 다른데 어떤 용도로 쓰였을지 궁금하군요. 위쪽에 잡석과 함께 오염된 흙으로 채워진 것으로 보아 말을 관리하며 나오는 오수를 걸러내 모으는 일종의 정화조 시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 사진입니다. 발굴현장에서 발견한 기와들을 모아 쌓아놓은 곳인데 지붕에 쓰인 여러형태의 기와들이 다 보이는군요. 자세히 보면 신석기시대부터 쓰였다는 빗살무늬기와도 보이는데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쓰였으니 어느시대 때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낱장 하나하나 조사하면 기와 안 쪽에 시대표시 같은 문장도 발견하지 않을까 싶군요.
이상은 지난 봄부터 강화군청 주차장 부지(살채터) 내 문화재 발굴조사 현황을 사진과 함께 설명한 내용인데 실 조사원들과의 대화가 없어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들어난 규모로 보아 검증도 가능할 만큼 구체적인 유적지가 발굴된 것으로 보이고 모르긴 해도 문화재급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발굴시한의 한계 때문인지 커다란 중장비를 동원하여 발굴하는 과정에 출토된 유적이 많이 훼손되어 아쉬운감이 있었고, 현장의 비공개로 관계자와의 대화가 부족해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 할 수 없었던 점입니다.
모두가 다 아는 백제문화 서울몽촌토성도 발굴초기 경제적 손실등의 정치적 이유로 몰래 덮으려다 관심있는 분들의 궐기로 사라질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고 그 외에도 상당한 수의 유적지가 같은 이유등으로 땅속에 묻혀있다 합니다.
강화는 고조선 단군신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숱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기록된 문화재들이 상당수 훼손됐거나 살아져 근대사를 대표하는 유적지 들이 강화읍 내에는 많치않은 것으로 보고 돼 있어 아쉬움이 있는데 이번 별효사청터 발굴을 통해 숱한 왕조들이 국가를 방위하는데 큰 몫을 기대했던 별효사청 문화유산이 재건되기를 바래봅니다.
201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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