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수도 한성을 지키기 위해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두었던 군사기지 겸 특별 행정구역이 유수부(留守府)이다. 東에 광주 유수부, 西에 강화 유수부, 南에 수원 유수부, 北에 개성 유수부를 두었다. 위의 사진은 1876년에 찍힌 강화 유수부 성안의 모습이며 현재 강화 읍내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AI를 이용하여 컬러로 바꿔 보았다. 초가집 위주의 취락과 한겨울인 2월의 모습이라 단조롭고 건조한 느낌이다.강화유수부內 주요기관의 실제 모습을 당시 사진 속으로 들어가 구경해 보자.. 1) 강화유수부의 외삼문(鎭禦保釐營) 2) 진무영(鎭撫營)의 중영(中營)3) 진무영의 열무당(閱武堂) 4) 별효사청 동영(別驍士廳 東營) 5) 남문 6) 석수문과 토끼다리 1) 강화유수부의 정문인 外三門이 "진어보리영 ..
얼마 전 지인이 웹상에서 발견했다며 위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줬다. 처음 보는 오래된 흑백사진인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 지금은 없어진 월곶포구와 같이 찍힌 강화 연미정(燕尾亭) 사진이다. 새로운 발굴이다.• 사진의 출처, 촬영자, 촬영시기를 알 수 없으나 분명 연미정과 그 아래 월곶포구(月串浦口)의 모습이다. 바다 위에 떠있는듯 한.. 좀처럼 볼 수 없는 구도와 선명한 옛모습이 이채롭다. • 연미정을 둘러싸고 있던 월곶돈(月串墩)의 체성은 거의 다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있고 수령 5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낭구 두 그루만이 양쪽에서 정자를 지키고 있다. • 정자 오른쪽 느티낭구 앞에는 여유롭게 풍광을 감상하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실루엣도 보인다. 이 거목은 2019년 태풍 링링의 바람에 쓰러져 생을 마쳤다. ..
갑구지 나루에서 버스 한 대를 싣고 출발한 엠뽀드가 성동나루터를 향해 오고 있다. 간조 물살에 아래로 밀려났다가 힘겹게 방향을 틀어 올라오고 있다. 1958년도에 포착된 저 엠뽀드의 낡은 엔진 비명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갑구지 나루는 강화대교가 생기기 전, 배를 통해 강화도와 육지를 왕래하던 관문이었다. 주소지는 江華邑 甲串里 "Just married"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길에 오른 신랑 신부가, 대절한 시발택시를 타고 갑구지 도선장에 막 도착했는데 간발의 차로 출발한 엠뽀드가 후진하며 뱃머리를 돌리고 있다. 60년대 초.중반쯤이니 지금, 나이 90을 바라보는 분들이 아닐까...황포 돛을 단 삼판선은 엠뽀드가 오기 이전에 여객이나 화물운송을 담당했는데 60년대만 해도 갑구지 앞바다에서 흔히..
강화도에는 살창리(殺昌里)라는 동네가 있다. 동네 이름치고는 너무 살벌한데, 우리 역사의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지명이기에 검색을 해보면 수많은 관련 글들이 나온다. 정식 행정명은 아니지만 몇백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며 살창리에서 살창이, 살챙이, 살채이로 음운변화하다가 현재는 '살채'로 굳어진 동네이다.(행정명 관청리에 속함) 필자는 유년기, 청소년기에 여기 살창리에서 살았다. 지금도 죽마고우와 지인들이 살고 있고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마을이다. 살창(殺昌)은 昌을 죽였다는 뜻인데 이 동네에서 죽임을 당한 昌이 누구인지를 자료 검색해 보면 3가지의 설이 뒤섞여 나온다.1설) 조선 15대 국왕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이 1614년에 살해된 곳이다. 2설) 고려 33대 ..
음력 10월 20일 쯤 돼서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고 찬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손돌바람, 손돌추위라고 한다. 손돌목이라는 강화해협의 좁은 물길을 공유하고 있는 강화와 김포, 특히 김포에서 지역 콘텐츠화하고 있는 손돌 뱃사공의 설화(說話)가 그것이다. 김포문화원 홈페이지에 올려진 내용을 보면 "손돌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으로,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워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조선시대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
1951년 6월에 행주(幸州) 부근에서 찍혔다는 설명이 붙은 이 사진은 625전쟁 때의 사진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사진이다. 탱크와 아기를 업은 소녀의 대비는 전쟁의 잔혹함이나 공포감, 위태로움을 시각적으로 잘 전달하고 있는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이 전차는 지금 포탑을 뒤로 돌려놓고 휴식 중이거나 고장나서 정지해 있는 상태로 보인다. 포탑이 차체 앞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 미군 M46 패튼전차는 장시간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사진처럼 포신을 뒤로 돌려 받침대로 고정시켜 놓는데 오히려 이 자세가 훨씬 균형 잡히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이 사진을 찍은 미해군 R.V.Spencer 소령 본인은 1950년 12월 평안남도에서 찍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사진인데 자료마다 1951년 6월 9일 행주에서 찍은 사진으로 ..
강화순무는 우리나라 전체 순무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강화만의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하리만큼 강화 쪽에 치중되어 있어서 일반적이지 못한 특수한 작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순무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작물이다. 순무는 예로부터 바다생선 대구와 함께 어려운 시기에 비상식량 역할을 톡톡히 했던 식품이기도 하다. 제갈공명이 전쟁 중에 식량이 부족한 병사들에게 먹였다는 제갈채(諸葛菜)가 그것이고 1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은 감자흉년의 위기를 순무가루로 만든 힌덴부르크빵으로 넘겼다.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30여 종의 순무가 다양한 형태의 음식으로 인간들의 식단 한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순무만큼 오랜 세월동안 전세계적으로 꾸준히 소비된 식재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용두돈은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돈대이다. 특별한 탄생비화 때문에 몇십 년 동안 서자 취급을 받으며 천덕꾸러기 노릇을 했던 돈대인데 독특한 지형에다 유려한 형태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 주변 풍광과도 잘 어울리는 돈대이다. 강화도 방어의 최전선을 담당했던 돈대들 중에서 외세 침략에 맞서 실제 전투를 치뤄 본 돈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신미양요 때 손돌목돈, 광성돈 그리고 용두돈(남성두南城頭)이 광성보 전투의 중심에 있었고 운양호 사건 때 초지돈 정도가 있다. 용두돈은 흔치 않은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 측면에서도 여타 돈대들보다 많으며 외형적으로도 볼거리가 많아 지금은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돈대가 되었다. 강화도에 있는, 있었던 54개 돈대 중 가장 나중에 생긴 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