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0월 20일 쯤 돼서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고 찬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손돌바람, 손돌추위라고 한다. 손돌목이라는 강화해협의 좁은 물길을 공유하고 있는 강화와 김포, 특히 김포에서 지역 콘텐츠화하고 있는 손돌 뱃사공의 설화(說話)가 그것이다. 김포문화원 홈페이지에 올려진 내용을 보면 "손돌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으로,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워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조선시대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
강화순무는 우리나라 전체 순무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강화만의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하리만큼 강화 쪽에 치중되어 있어서 일반적이지 못한 특수한 작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순무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작물이다. 순무는 예로부터 바다생선 대구와 함께 어려운 시기에 비상식량 역할을 톡톡히 했던 식품이기도 하다. 제갈공명이 전쟁 중에 식량이 부족한 병사들에게 먹였다는 제갈채(諸葛菜)가 그것이고 1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은 감자흉년의 위기를 순무가루로 만든 힌덴부르크빵으로 넘겼다.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30여 종의 순무가 다양한 형태의 음식으로 인간들의 식단 한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순무만큼 오랜 세월동안 전세계적으로 꾸준히 소비된 식재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용두돈은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돈대이다. 특별한 탄생비화 때문에 몇십 년 동안 서자 취급을 받으며 천덕꾸러기 노릇을 했던 돈대인데 독특한 지형에다 유려한 형태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 주변 풍광과도 잘 어울리는 돈대이다. 강화도 방어의 최전선을 담당했던 돈대들 중에서 외세 침략에 맞서 실제 전투를 치뤄 본 돈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신미양요 때 손돌목돈, 광성돈 그리고 용두돈(남성두南城頭)이 광성보 전투의 중심에 있었고 운양호 사건 때 초지돈 정도가 있다. 용두돈은 흔치 않은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 측면에서도 여타 돈대들보다 많으며 외형적으로도 볼거리가 많아 지금은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돈대가 되었다. 강화도에 있는, 있었던 54개 돈대 중 가장 나중에 생긴 돈..
1871년 신미양요가 발발한지 올해로 꼭 150년이 되었다. 미해군 아시아함대의 포함 두 척이 6월 1일(이하 양력) 수로를 탐측한다며 일방적으로 강화도 손돌목 수로에 진입하여 발생한 포격전, 6월 10일 미해군 전투병력 651명의 초지진 상륙과 이어지는 광성보 전투, 그리고 조선군의 지리멸렬과 미함대의 빈 손 철수까지의 과정은 그동안 여러 매체와 다양한 필자들에 의해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사실의 나열에다 과장과 축소 그리고 미화가 덧씌워진 일반적인 스토리 전개에서 벗어나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던 의문점 몇가지를 들어 분석하고 비판하고 반성하므로써 징비(懲毖)의 의미를 담은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 군지휘관의 敵前 교체 미스터리-1 1871년 5월 19일 우리 해역에 진입한 미해군 아시아함대는..
돈대는 조선시대에 돌로 쌓아서 만든 일종의 경계초소인데 우리나라 어디에도 강화도만큼 돈대가 많은 지역은 없다. 17세기에 집중적으로 축조된 돈대는 현재 쉰 두 개가 전해지는데 대부분 숙종 대에 쌓았다. 강화도를 최고의 보장지(保障地), 즉 변란을 당했을 때 왕조가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인식한 숙종은 강화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방어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서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이 할아버지이고 청의 수도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을 아버지로 둔 숙종은 청나라의 위협에 남다른 소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만반의 대비를 하고자 했을 것이다. 효종 대에 이미 진(鎭)과 보(堡)라는 경비부대를 배치해놓고 있던 강화도이지만 섬을 빙 둘러싸는 50여 개의..
강화도에 있는, 있었던 54개 돈대 중 가장 마지막에 쌓은 작성돈(鵲城墩)을 찾아 나섰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숲이 작성돈이 있는 양사면 북성리 산633번지이고 해안선 철책을 따라 왼쪽으로 7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보이는 아주 작은 동산에는 구등곶돈(龜登串墩)이 있다. 강화도 최북단 돌출부인 양사면 북성리에는 돈대가 네 개씩이나 있다. 양사면 전체로 보면 아홉 개가 된다. 좁은 지역에 이렇게 많은 돈대가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여기가 강화도 방어의 요충지라는 뜻이다. 청나라의 위협을 받던 당시의 조선이나,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지금이나 상황은 비슷하다. 그래서 9개 돈대 중 5개는 현재도 해병대가 사용 중인 현역 돈대이다. 나무 숲 사이에 숨어있는 작성돈이 살며시 윤곽을 드러내 보인다. 지나가며 얼핏 보..
스타가 된 돈대.. 건평돈(乾坪墩)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39 번지에 위치한 건평돈은 지방기념물 38호로 지정된 121m 둘레의 돈대이다. 양도면 건평리 해안가의 야트막한 노고산 중턱.. 앞이 탁 트여 전망이 좋은 건평돈은 석모도와 마주하며 생긴 좁은 수로를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 멀리 퇴모산, 혈구산, 고려산, 봉천산, 별립산이 보인다. 건평돈을 품고있는 老姑山은 할미산을 한자의 뜻으로 새긴 명칭이다. 그래서인지 이 돈대 이름도 원래는 건평 한미당(乾坪 漢尾堂)이었다. 漢尾 역시 할미를 한자의 음으로 표기한 것이니 한미당은 삼신할미가 사는 집이라는 뜻일까? 웬지 영험한 기운이 돈대를 감싸는 듯하다. 가로 36m 세로 26m 크기의 건평돈은 1679년에 최초로 축조한 48돈대 중..
연미정..월곶진址..월곶돈 그리고 朝海樓 지난 주에 모임이 있어서 강화읍에 갔다가 시간이 조금 남길레 가까이에 있는 월곶리를 찾았다. 여기 오면 몇가지 유적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서 좋다. 연미정 / 월곶진址 / 월곶돈 / 외성 그리고 朝海樓이다.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조해루다.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던 50여 리가 조금 넘는 外城에는 출입문이 여섯 개 있는데 그 첫번째 문의 누각이 이 朝海樓다. 그런데 앞에 서있는 설명판은 뜬금없이 '월곶진'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 복원한 분이 외성의 문루와, 해안경비부대인 진(鎭)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저 위에 둥그런 월곶돈(月串墩)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돈대와 연결된 외성줄기의 여장(女墻)이 계단식으로 늘어서 있고 푸른잔디 한가운데엔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