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스타가 된 돈대.. 건평돈(乾坪墩)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39 번지에 위치한 건평돈은 지방기념물 38호로 지정된 121m 둘레의 돈대이다.
양도면 건평리 해안가의 야트막한 노고산 중턱.. 앞이 탁 트여 전망이 좋은 건평돈은 석모도와 마주하며 생긴 좁은 수로를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 멀리 퇴모산, 혈구산, 고려산, 봉천산, 별립산이 보인다.
건평돈을 품고있는 老姑山은 할미산을 한자의 뜻으로 새긴 명칭이다. 그래서인지 이 돈대 이름도 원래는 건평 한미당(乾坪 漢尾堂)이었다. 漢尾 역시 할미를 한자의 음으로 표기한 것이니 한미당은 삼신할미가 사는 집이라는 뜻일까? 웬지 영험한 기운이 돈대를 감싸는 듯하다.
가로 36m 세로 26m 크기의 건평돈은 1679년에 최초로 축조한 48돈대 중 하나로 외포리 포구에 주둔했던 소대級 경비부대 정포보(井浦堡) 소속이다. 오른쪽으로 2.2 Km 떨어진 곳에 굴암돈이 있고 왼쪽으로는 3.2 Km 떨어진 외포항의 서편 언덕에 망양돈이 있다. (뒤쪽에 진강산이 보이는 이 사진은 발굴 복원 전 반파상태의 모습이다.)
그런데.. 별로 알려지지도 않고 찾는 이도 없어 오랫동안 마을 뒷동산 수풀 속에 방치된 채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있던 건평돈이 2017년 4월 발굴조사를 하면서 순식간에 스타돈대로 떠올랐다.
郡에서 돈대를 복원하기위해 기초발굴조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뜻밖에..!! 무너진 포좌의 바닥에서 337년(1680년~2017년)이나 된 불랑기포(佛狼機砲)의 포신 하나가 출토되었다. 이 발굴뉴스는 당시 모든 매체에서 보도경쟁을 할 정도로 떠들썩했었다.
건평돈에서 발굴된 불랑기포의 윗면과 옆면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길이 1050mm, 구경 40mm로 1호부터 5호까지 있는 불랑기포의 규격 중 4호에 해당한다. 실전배치된 최전선 현장에서 멀쩡하게 발굴됐다는 점..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만든 사람, 시기, 장소를 알 수 있다는 점 등이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 다만 포신(母砲)만 발굴된 것이 조금 아쉽다.
다른 4호 불랑기포 사진에서 보듯, 장전용 탄약통인 자포(子砲)가 있어야 한 세트를 이루는데 이게 빠졌다. 장전 후 자포를 고정시키는 잠철(箴鐵)도 보이지 않고.. 포미부분에 길쭉하게 꽂혀 있어야 할 나무 손잡이(木柄)는 썩어서 없어진 듯.
불랑기포가 출토됐던 포좌는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강화도 돈대의 포좌는 장전용 탄약통을 포미에 장착하여 발사하는 후장식(後裝式) 불랑기포만이 운용할 수 있는 구조이다. 당시 일반적이던 전장식(前裝式) 화포는 사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새로 복원한 포혈(砲穴)이 반듯하게 뚫려있다. 저기로 불랑기포 4호의 포신이 불쑥 나와 있어야 하는 데 좀 아쉽다. 조선시대 사료를 보면, 당시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불랑기포의 간편성, 신속성, 전술적 적합성 등의 우수함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 강화도에 배치되었던 화포 중에서 불랑기포 4호, 5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부 돈대에 보여주기식으로 근거도 없는 홍이포를 갖다 놓았는데 이것은 역대급 넌센스..!!
포혈 밖으로 해안도로와 바다가 보이는데 웃자란 나무들이 시야를 방해한다. 여기에다 불랑기포 모형이라도 만들어 실제와 같이 거치해 놓고 사계청소(射界淸掃)까지 깨끗하게 해놓으면 탐방객들에게 진정한 돈대의 모습과 의미를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무너졌던 곳에 새로운 돌을 끼어 맞춰 복원한 성벽의 모습.. 아직까지 복원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주변이 많이 어수선하다.
여기 출입문 쪽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돈대 앞쪽 완성된 성벽 위에 여장(女墻)까지 쌓아 올리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나저나 강화도에 복원된 돈대 중에는 여장이 없는 돈대가 꽤 있다. 뭔가 사정이 있을테지만 여장없는 성벽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귀중한 유물 불랑기포가 발굴되는 바람에 졸지에 스타 돈대가 되었지만 복원공사는 더디기만 하다. 진입로 공사도 겨울철이라 하다 만 것 같은데 앞으로 관광 잠재력도 큰곳인 만큼 돈대다운 돈대로 거듭 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너진 입구 옆에 세워놓은 설명판이 신형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다른 돈대 설명판에는 48돈대를 40일만에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새로 만든 이 설명판에는 80일로 나와있다. 무엇을 근거로 고쳐놨는지 모르지만 이것도 틀렸다. 사료를 잘 검토해보면 공사기간이 6개월 정도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중한 우리의 역사유적을 복원함에 앞서 좀 더 진지한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2019년 12월 18일
'江華史探'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대의 고장 강화, 이것만은 바로 알자 (2) | 2020.12.25 |
---|---|
마지막으로 쌓은 돈대..작성돈(鵲城墩) (1) | 2020.10.03 |
강화도 제 1의 요충지 - 월곶돈(月串墩) (0) | 2020.03.05 |
머릿돌 명문이 있는 - 계룡돈( 鷄龍燉) (0) | 2020.03.02 |
원형을 많이 간직한 얼짱돈대 - 후애돈(後崖墩) (0) | 2020.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