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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진무영의 연병장 전경 (1876년, 河田紀一)

이 한 장의 오래된 사진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위 사진은 1876년에 찍힌 강화 진무영(鎭撫營)의 전경인데 한가운데 열무당(閱武堂)의 모습이 보입니다. 뒷쪽에는 13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보이는 북산의 능선이 눈에 정겹고 오른쪽에는 내성(內城) 줄기 일부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 밑으로 보이는 현 강화초등학교 자리에는 세곡(稅穀)을 쌓아두는 사창(司倉)과 진무영 운영비로 쓰이는 포량미(砲糧米)를 보관해 두었던 포량창(砲糧倉)이 길게 서있습니다. 열무당 앞쪽으로는 넓은 연병장이 보이는데 여기가 나중에 강화 上시장이 되는 자리입니다.

진무영은 조선 숙종때부터 수도권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에 주둔했던 군부대인데 지금 식으로 말하면 '강화해역경비사령부(江華海域警備司令部)' 쯤 되겠습니다. 당시 장관급인 강화유수가 사령관 격인 진무사(鎭撫使)를 겸임했으나 실질적인 군무(軍務)는 종2품 무관인 중군(中軍)이 집무처인 중영(中營)에서 수자기(帥字旗)를 걸어놓고 지휘, 통솔하였습니다. 중군은 지금 계급으로 치면 군단장직을 수행하는 쓰리스타, 중장(中將)에 해당하는 고위 장교입니다. 1871년 신미양요때 순절한 어재연장군의 계급이 바로 이 중군이었지요.

열무당(閱武堂)은 이 부대의 연병장에 있는 사열대로 요즘 웬간한 운동장에는 하나씩 다 있는 로얄박스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진무사가 여기서 훈련도 참관하고 사열도 받던 곳이지요. 이 자리에는 1930년대(?)부터 군농협 건물이 들어서 있다가 최근에 모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강화 진무영의 열무당에 거치된 일본군의 개틀링 기관총 (1876년, 河田紀一)

이 사진은 열무당을 클로즈업한 사진인데 운양호 사건이 있은 후 진행되고 있던 조일회담(朝日會談)의 일본측 수행원인 하전기일(河田紀一)이 1876년 2월, 추운 겨울에 촬영했습니다. 여러 사료에도 많이 등장하는 사진으로 "일본군이 위압적이고 강압적인 회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회담장 주변에 거치해 놓은 대포"라는 설명이 붙어 있을 겁니다. 한 눈에 보더라도 바퀴 달린 4문의 대포가 위압적인 모습으로 열무당 內에 정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무기의 정확한 실체는 대포가 아니라 당시 최첨단 무기였던 '개틀링 기관총'이었습니다. 1862년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리처드 개틀링(Richard J. Gatling)이라는 의사가 발명하여 첫선을 보였습니다. 기존의 총열 6개를 묶어서 회전시켜 다수의 탄환을 발사하도록 고안된 무기이죠. 한 정의 총으로 한 발의 탄환을 발사할 동안 이 게틀링은 묶여진 총열을 옆에 달린 손잡이로 회전시켜 탄환을 연속적으로 발사하는 무기였습니다. 송탄, 장전, 격발, 배출 등 일련의 발사과정을 순전히 사람 힘에 의존하는 완전 수동식 기관총이지만 1분에 500여 발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엄청난 화력을 지녔습니다.일본 자료에는 ガトリング砲(回転速射砲)라고 표기되어 있는 이 기관총이 그 때 흔한 구식 대포보다 대인 살상력에 있어서는 훨씬 무서운 무기였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 나오는 개틀링 건이 동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획기적인 신무기였지만 보수적인 미군 당국은 탄환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채용하지 않습니다. 이 신무기만 있으면 어떤 전투라도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걸 마다하다니..지금으로선 이해가 안가지만 당시 보병부대 소총수의 최고 덕목이 원샷 원킬(One Shot, One Kill)이었음을 상기해 볼 때 조금은 납득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대부분 전장식(前裝式)소총을 사용했던 이 때 병사들은 총구를 통해 화약을 다져 넣고 그 위에 탄알을 집어 넣어 장전하는 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 발 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으니 이 천금같은 총알 한 발, 한 발을 함부로 쏴 제낄 수는 없었겠지요..

동서고금을 망라한 군대라는 집단의 보수적 성향은 유명하잖습니까. 현재 최고의 개인화기로 정평이 나있는 M-16과 AK-47 자동소총이 1950년대 말에 설계되어 지금까지 50년 이상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새로운 총기가 채택되어 보편화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틀링 기관총이 개발된지 10여년 만에 극동의 일본군의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놀랍고 우리에게는 불행한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불길한 이벤트였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미국도 기병대의 인디언 토벌작전 등의 활약으로 결국 1881년에 제식 기관총으로 채택하고 필리핀과 쿠바에서 벌인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1890년대가 되자 극동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도 드디어 이 개틀링 기관총이 도입되어 조선군에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인명을 살상하게 됩니다. 1895년 동학농민전쟁의 하이라이트인 우금치 전투에서 2,500명의 관군이 10,000여명의 동학 농민군을 거의 전멸 시키다시피 하는데 그 주역이 바로 이 개틀링 기관총이었습니다.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치 언덕이 기관총을 거치해 놓고 전투를 벌이기에 최상의 지형이라고 군사 전문가들은 말하더군요. 이런 언덕 위에 배치된 다섯정의 개틀링 기관총에 맞서 무작정 돌격해오는 농민군은 너무나 손쉬운 타깃이었던거죠 겨우 500여명이 살아 남았다고 하니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라 할 정도로 처참했을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몸서리 쳐지는 일입니다. 19세의 김구 선생도 참가했던 동학농민전쟁이 이렇게 최신 무기에 의해 종말을 고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 놀라운 기관총도 이즈음 종말을 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1884년에 하이람 맥심(Hiram S. Maxim)이라는 미국 발명가가 전혀 새로운 개념의 맥심 기관총을 발명해 세상에 내놓았는데 여러가지 장점 때문에 기관총의 대세가 급격히 맥심으로 기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맥심이 발명한 이 수냉식 자동 기관총은 탄환이 발사될 때 생기는 반동 에너지(가스압)와 스프링, 지렛대로 이뤄진 장치의 힘으로 탄환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자동 사격 방식이었고 사수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분당 650발의 탄환을 쏟아냈습니다. 단총신으로 무게도 훨씬 가벼워져 운용이나 이동, 정비가 쉬워진..모든 면에서 현대 기관총의 시조가 되는 제품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덩치 크고 쓰기 불편한 손잡이 회전 방식의 개틀링 기관총은 구시대의 무기가 되어버렸죠 그래서 전장에서는 점차 가스 작동식의 총들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고 개틀링은 점차 사라져 가고 말았습니다.

맥심은 직접 무기를 들고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였습니다. 적극적인 무기 세일즈에 나섰던 맥심은 1890년대 들어 영국·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러시아까지 자동 기관총을 납품하기에 이릅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이 극성맞은 무기상인들은 드디어 대한제국에 까지도 20여정의 맥심 기관총을 판매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대한제국군의 병력은 채 30,000명이 안되는 소규모였지만 무기만큼은 최신예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새로운 기관총의 위력을 실감케 한 대표적 전투로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의 여순(旅順)공방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노기(乃木)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하루에 무려 5만8000명의 전사자를 냈지요.이는 20세기에 벌어졌던 전쟁 중 하룻동안의 전투에서 입은 인명손실의 최고기록입니다. 그 다음이 제1차 세계대전시 독일군과 벌인 솜므(Somme)전투에서 나온 영국군의 전사기록 5만7천4백70명이 530명 차이로 2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대기록들이 모두 맥심 기관총에 의한 것들이었습니다.

 

1916년에 영국이 만든 최초의 탱크 Mark-1, 특이하게 포탑이 옆구리에 달려있다. 이 신무기의 암호명이 물을 저장하는 탱크(Tank)였는데 이게 나중에는 전차를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맥심 기관총의 출현은 연쇄적인 전술 변화를 가져왔지요. 보병이 대열을 갖춰 정면 돌격하는 전술은 완벽한 자살 행위가 되었습니다. 보병들은 살기 위해 참호를 파야 했으며 참호를 나와 적진으로 돌격하는 보병은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공격보다 방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새로운 전쟁 양상이 출현한 것이지요. 이에 영국은 기관총의 탄막을 뚫고 방어선을 돌파할 새로운 수단을 강구하게 됐고 그 결과 전차라는 것을 고안하여 투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맥심 기관총은 탱크라는 새롭고 획기적인 지상무기를 등장시킨 주역으로 또 역사에 기록됩니다.

 

M61 Vulcan Cannon

그러나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던 개틀링 기관총이..아니 한 때 사라졌던 이 총이 20세기 중반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제트 전투기가 실용화되면서 종래 항공기에 사용되던 기관총들의 한계가 나타납니다. 프로펠러 전투기 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속도를 가진 제트기의 공중전에서는 아무리 발사속도가 빠른 기관총이라도 적을 제압할 만큼의 화력을 내지 못했지요. 그래서 미 공군에서 계획하고 제네럴 일렉트릭社에서 추진한 것이 'Project Vulcan'이라는 초고속 화기의 개발 계획인데 그 결과, 총신을 손으로 돌리던 19세기 개틀링 건이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新개틀링 건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프로젝트 명을 딴 벌컨이라는 애칭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이 새로운 화기는 전동 회전하는 6열 총신으로 분당 6,000발을 발사하는 막강한 화력을 보여줍니다. 1956년 제식명칭 M61로 미 공군에 채택된 이 기관총은 당시 센츄리 시리즈 전투기부터 시작하여 최신예  F-22 스텔스 전투기에까지 장착되는 전투기용 고정장비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장갑차, 함정, 공격헬기 등에 장착하여 공대공 전투기용으로 뿐만 아니라 지상화력지원용, 대공용, 근접방어용 등으로도 사용되고 각 목적에 따라서  30mm, 25mm, 20mm, 12.7mm, 7.56mm, 5.56mm의 다양한 구경과 7총신, 6총신, 5총신, 4총신, 3총신 등 다양한 총신의 베리에이션을 보여주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20미리 6총신의 발칸포를 자체 생산하였지요. 이제  '개틀링 건(Gatling Gun)'은 이 모두를 총칭할 때 쓰는 일반명사가 되어 그 옛날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하고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강화진무영의 열무당에 늘어 선 4정의 개틀링 기관총의 위세에 눌려 일방적으로 불리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던 우리도 132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 10위권(육군 전력은 세계 3~6위권)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선진 강군으로 거듭 나고 있습니다. 그때의 굴욕을 개틀링 건처럼 설욕할 기회가 우리에게도 오겠지요.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니 잘 들여다 보고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200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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