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대적 착오로 오염된 강화산성
강화에는 좀 유별난 집착이 하나 있다. 있는 조선시대 놔두고 없는 고려시대를 자꾸 내세우려 하는 것이 그것인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강화의 대표 유적 '강화산성'이다. 이 성은 지금으로부터 딱 300년 전 조선 숙종 때인 1710년에 쌓은 성인데 여기에다 자꾸 '고려'라는 포장지를 씌워 보려고 애쓰는 형국이어서 역사 왜곡을 지적하기에 앞서 안스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조선시대 4대史書라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을 조금만 들여다 봐도 답이 명확히 나오는데 이걸 소홀히 하고 있다.
지금 당장 '강화산성'을 인터넷 검색창에 집어 넣어 나오는 검색 결과를 한번 보시라.
몽고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쌓은 고려시대 성으로 왜곡된 기사가 웹상에서 무한증식하고 있다. 무너져 없어진지 752년이나 된 성이 유령처럼 21세기를 떠돌고 있다. 기존에 강화에서 발간한 각종 문헌자료, 안내문 등이 그 왜곡의 시발점임은 물론이다. 39년 간의 짧은 도읍 시절이 아쉬워서일까?.. 남한지역 고려시대 유적의 희소성에 기대어 관광자원으로 부각시키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이 문제를 알면서도 시정할 열의나 용기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혹시 관련자들이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다.
관련 학자들도 현지의 이런 분위기를 의식하는 듯 핵심은 건드리지 않고 우회하므로써 곡학아세를 의심 받고있다. 그러나 필자의 지적을 뒷받침하는 현시대의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007년에 인천박물관에서 조사하고 펴낸 '강화산성 지표조사 보고서'에는 정확하게 강화산성은 조선시대의 성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는 강화산성이 고려시대의 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강화 사람들을 무척 당황하게 하고 실망하게 할 것이다. 필자도 역시 강화사람이고 강화산성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 애착이 많이 가는 유적이지만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무슨 밀가루 반죽처럼 전략적인 考慮에 따라, 또는 특정 시대 사람들의 감정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져서는 아니 되겠기에 강화산성의 여러 잘못된 점들을 여기 제기하고 관계자들의 심도있는 연구와 시정을 촉구하고자 한다.
강화읍 성곽 계보도는 진실을 찾아가는 지도
아래는 강화읍의 성곽 계보도이다. 강화읍 지역의 성의 역사가 좀 복잡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왠만해서는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이 복잡한 것을 체계도 잡지 않고 뒤죽박죽 섞어서 한 줄로 표현하거나 또는 한 문장에 우겨 넣다보니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성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강화읍 지역에 존재했던, 그리고 존재하는 성의 계보라 할까 역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도표로 정리해 봤다. 현재 복원 중에 있는 강화산성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도표를 보면서 그 뿌리를 찾아가 보자.
고려시대의 城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고려시대 江都에는 세 개의 城이 축성되었다. 몽고의 1차 침략이 있자 1232년 수도를 강화로 옮기고 3년 여에 걸쳐 궁궐과 관청 건물들을 지었는데 이 때 현 고려궁지와 관청리 일대를 둘러싸는 내성(內城)을 쌓았다. 궁궐과 관청들을 방어하기 위한 이른바 궁성(宮城)이다.
1237년에는 육지와 면한 동쪽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외성(外城)을 쌓았고 1250년에는 궁성(내성)과 함께 강도권역 전체를 커버하는 대규모 중성(中成)을 쌓았는데 이 성이 바로 도성(都城)이자 황성(皇城)이다. 이 세 개의 성들은 숙명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흙으로 쌓은 土城이고 1259년에 몽고의 강요로 동시에 파괴되어 한 순간에 사라진 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토성의 흙가루가 바람에 날려도 다 날아갔을 752년이라는 엄청난 시간만 흘러갔을 뿐이다.
헷갈리는 존재, 조선 초기 강화도호부城
1259년에 강도 내성,중성,외성이 헐려 없어지고 1270년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 해버리자 江都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강화현으로 강등된 치소(治所)마저 심주(沁州)로 가버리니 그야말로 잡초만 우거진 황성(荒城)옛터가 되어 무심한 세월의 더께만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162년이 흐르고 왕조도 바뀌어 바야흐로 조선 세종 14년 (1432년)이 되자 도호부로 승격된 강화의 치소와 이를 방어할 도호부성을 어디에 쌓느냐를 가지고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쉽게 결론이 안나자 골치가 아파진 세종대왕께서는 여러 고위 관료들을 강화에 보내 직접 현장을 살펴보고 와서 의견을 제시하도록 했다.
강화도호부성의 유치를 두고 배지평背只平(내가저수지 일대로 추정)과 옛 성터(현 고려궁지와 관청리 일대)가 치열하게 맞붙은 상황에서 현지답사를 하고 온 관료들의 의견도 역시 양쪽으로 갈렸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던 당대의 축성 전문가이자 병조판서인 최윤덕 장군이 古城터를 강력하게 미는 바람에 옛날 고려 내성이 있던 자리, 현 강화읍에 강화도호부성 축성이 결정되고 아울러 치소를 유치하게 된다.
이 성은 고려 강도시대 내성 자리에다 쌓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려시대의 유적을 복원하는 차원이 아니고 이전해 온 강화도호부를 방어할 목적으로 새롭게 돌로 쌓은 성인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같은 규모로 쌓았고, 외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일부에서 內城이란 표현을 썼던 만큼 고려시대의 DNA를 조금은 간직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고려 내성과 조선후기에 축성된 강화유수부성(현 강화산성)의 중간 쯤에 존재했던 이 성은 현재 흔적도 없고 역사적 언급에서도 이 성의 존재는 아예 빼먹거나 아니면 강화유수부성(현 강화산성)이 고려시대의 성으로 행세하는데 근거 아닌 근거 역할을 하고 있다.
◀1684년(숙종10년)에 그린 江都全圖 중 현재 강화읍 부분이다. 조선 초, 세종 때 쌓은 강화도호부성을 이 때까지 고쳐가며 유수부城으로 사용 중이었는데 亭子山(見子山)과 동락천, 花山(남산)이 포함되지 않은 작은 규모의 이 城에서 고려 강도시절 내성의 틀을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다. 연도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강화지도에 그려진 이 城의 흔적은 지금 찾아보기 힘들다.
◀ 위의 지도에 나온 강화도호부성의 위치를 현재의 위성사진에다 옮겨 그려봤다. 당시 성의 남문은 현재 김상용선생 순의비가 있는 자리에 있었고 오른쪽으로 '성마루'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성공회 성당 언덕길을 따라 북산 줄기로 이어졌고 남문 왼쪽은 열무당과 진무영 중영이 있던 현 강화읍사무소 뒷쪽으로 성줄기가 이어지다가 성광교회 언덕으로 돌아 올라가 역시 북산 줄기로 연결되는 모습이었다. 만약 고려 내성을 복원한다면 이 코스가 될텐데 주거 밀집지역이라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강화유수부성의 탄생
모든 성이 그렇듯이 한번 잘 만들어 놓은 성곽은 오랜 세월동안 시대를 초월하여 사용되는게 보통이다. 강화도호부성도 조선 初에 축성되어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18세기 초까지 존속하게 된다. 준공 후 280여 년을 사용해 오면서 수없이 많은 修築작업을 거쳤으리라 짐작되는데 성의 규모가 작고 낡아 한계에 봉착하니 북벌을 계획하던 효종 조부터 새로운 성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불과 60여 년 전 병자호란의 참화를 당해 본 이후라 더 견고한 보장지처를 만들고 싶어했던 숙종은 비국당상(備局堂上)들에게 강화유수부성 축성 프로젝트의 진행을 명한다.
당시 숙종임금의 강화유수부성의 축성 의지가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보여주는 비변사등록 한 구절을 보자. 숙종 34년(1708년) 12월6일조에 보면 "上曰, 昔者, 趙簡子之必欲以晉陽依歸者, 有可恃之勢而然耳, 卽今都城, 周廻闊大, 雖動八路之民, 非一二月之間, 所可修築, 南漢則地勢孤絶, 亦非久守之地, 江都雖有天塹, 內無城築, 尙未完備, 故欲築內城於江都, 必爲他日依歸之地, 可以周旋物力, 速爲完築, 不可曠日而持久也。"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조간자(趙簡子 : 전국시대戰國時代 진晉의 대부大夫 )가 기어코 진양(晉陽)으로 의지할 곳을 삼으려 한 것은 믿을 만한 형세가 있었기에 그러한 것이다. 지금 도성(都城,서울)은 둘레가 넓고 커서 비록 8도의 백성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한, 두 달 사이에 수축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고, 남한산성은 지형이 외따로 떨어져 있어 오래 지킬 수 있는 곳이 못되며, 강도는 비록 천참(天塹,돈대)이 있다 하나 내성(內城)을 아직까지 완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도에 내성을 쌓고 반드시 후일에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삼으려 한 것이니 물력을 주선하여 속히 완축할 일이지 시일을 끌어 오래 걸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축성의 범위에 남산을 포함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기획단계에서부터 많은 논란이 벌어져 숙종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등재된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비국당상(備局堂上)들과의 논의 내용과 최종 의사결정 과정을 요약해 살펴보자. 비변사(備邊司)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안보장관회의(비상국무회의) + 합동참모본부' 쯤 되고 이의 멤버인 비국당상은 안보관련 국무위원들이 되겠다.
■ 1708년 숙종34년 12월7일
이 날도 영의정 최석정, 신임 강화유수 박권, 이조판서 조상우, 行예조판서 이인엽, 공조참판 민진원 등이 새로 쌓는 성에 남산을 포함 할 지 말 지를 두고 설왕설래했지만 양쪽 의견을 경청한 숙종이 "반드시 남산을 넣어서 쌓을 것"으로 교통정리한다.
■ 1709년 숙종35년 축성시작
일 년전 숙종이 남산을 넣어서 쌓을 것을 결정했으나 강화유수 박권은 영의정 최석정의 현지 지휘아래 3城, 즉 품(品)자형 성을 쌓기 시작한다. 이 설계변경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영의정이 숙종의 재가를 받았으리라 본다.
◀ 品자 城은 공사규모를 축소하여 예산을 줄여보자는 데 촛점을 맞춘 아이디어였다. 기존의 부성은 보수해서 그대로 쓰고 남산에 작은 산성을 하나 쌓아 감제고지를 선점하고, 견자산에는 돈대를 설치해서 기각지세(掎角之勢) 를 이루게 하면 방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결과적으로 폐기된 案이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 안을 선호한다. 성이 작아 지키기 쉽고 세 성이 유기적으로 호응하면 강력한 방어력을 보여줄 수 있겠다. 다만 군사들의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쉽게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다.
■ 1710년 숙종36년 7월2일
4월29일 박권의 후임으로 강화유수가 된 민진원이 입시하여 강화성의 남산 포함 여부 건을 다시 제기하여 장시간 논의를 이어간다. 민진원 유수는 남산을 포함하는 큰 성을 원했으나 영의정 이여, 우의정 김창집, 형조판서 유득일, 공조판서 김석연, 병조참판 박권(직전 강화유수), 行사직 이언강 등 참가한 비국당상 대부분이 품자형 성(3성)을 지지하고 숙종마저 품자형 성을 지지하니 유수 민진원은 전임 박권이 진행하던 품자형 성의 공사를 그대로 이어간다.
■ 1710년 숙종36년 8월17일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오빠인 강화유수 민진원은 의지의 조선인이었다. 한 달 반 전인 7월2일의 결정에도 굴하지 않고 또다시 남산을 포함하는 府城 축성계획을 들고 숙종 앞에 나타서는 품자형 성(3성)의 문제점을 하나 하나 아뢰고 남산을 포함하는 1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지난 7월2일에 남산포함 1성에 반대했던 대부분의 비국당상들이 이 번에는 품자 성 반대, 남산포함 1성에 찬성으로 돌아서며 민진원의 편에 섰다. 한 달 반동안 민진원은 이들을 열심히 설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강화 민심도 모두 통틀어서 한 성으로 만들기를 원한다는 연명(聯名) 호소문까지 첨부하니 숙종 임금이 이르기를
" 처음에는 남산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였다.그러나 물력(物力)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또 3성 쌓기로 결정하여 기각지세로 만들려 하였다. 지금 유수의 아룀을 들은 즉 계획이 타당하니 생각이 장원(長遠)하다고 할 수 있다. 3성은 쌓지 말고 아뢴 바에 의해서 통틀어서 한 성으로 만드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하였다.
■ 1710년 숙종36년 12월3일
남산포함 1성으로 최종 결정된 축성공사가 정확히 몇날 몇일에 완공되었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이 날 강화유수 민진원이 파수군졸 배치 건으로 임금의 결재를 받으러 온 자리에서 "내성을 쌓았으니 마땅히 파수군졸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한 언급으로 봐서 강화유수부성은 이미 1710년 12월3일 이전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8월17일에 남산포함 1성이 최종 결정되었으니 4개월 만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정의 열악한 재정상태 때문에 감히 꿈도 못꾸던 대역사였지만 조선 8도의 물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빠른 시일 내에 축성을 마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숙종의 의지가 강했고 공사를 지휘 감독한 숙종의 처남, 강화유수 민진원의 추진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강화유수부성이 완공된(1710년)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지도의 성곽 부분이다. 주황색으로 표시한 윤곽이 막 완공된 강화유수부성이고 그 안에 보라색으로 표시한 J자 모양의 선이 세종 때의 도호부성인데 동쪽과 남쪽 성벽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서북쪽 흔적만 남은 자리는 토성 구간이거나 이미 허물어진 곳으로 추정된다. 구성(舊城)과 신성(新城)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강화지도이며 신성 즉 강화유수부성(강화산성)이 고려시대의 성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역사자료이다.
훗날 강화산성이 된 강화유수부성의 의미와 결론
이 성의 공식 명칭은 '江華留守府城'이지만 실상은 임금의 성, 즉 王城이라고 봐야한다. 변란시 왕의 최후의 피난처인 강화행궁을 방어하는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이기 때문이다. 강화유수부성은 강화라는 일개 지역의 축성공사가 아닌, 바로 王事였기 때문에 아주 열악한 재정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각 부서와 지역을 초월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 내에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변사등록에 기록된 일련의 축성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숙종의 의지가 강력히 반영된 왕성인 강화유수부성은 18세기 조선후기의 왕권사상과 축성술이 결합된 성곽으로 고려 강도시대의 城과는 전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현재 '강화산성'에 잘못 붙어있는 '고려시대의 성'이라는 꼬리표를 이제는 떼어내 강화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江華史探'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산성 - (下) 이제는 오류 범벅 안내판을 떼자! (0) | 2019.04.28 |
---|---|
강화산성 - (中) 이제는 山城 이름표를 떼자 (0) | 2019.04.28 |
1901년 강화 화승총考 (0) | 2019.04.28 |
강화 진무영의 열무당(閱武堂)과 기관총 (0) | 2019.04.28 |
광성보 전투 재현을 위한 제언 - 美軍편 (0) | 2019.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