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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의 얼굴 - 안내판
어떤 유적이든지 그 유적 앞에 서있는 안내판만큼 그 유적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자료는 없다고 본다. 또 그래야 하고 사람들은 또 그렇게 믿고 있다. 탐방객이 유적 현지를 직접 찾아가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문헌자료나 인터넷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현지에서만 접할 수 있는 정확하고 깊이있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내판의 중요성이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간 그들에 의해서 전파되는 유적의 안내문은 잘 발달된 각종 매체를 통해 사통팔달 퍼져나갈 뿐 아니라 정보 재생산의 원본이 되고 근거자료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적 안내문은 역사적 근거에 의한 충실한 내용과 함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되고 이해될수 있는 스토리 구성과 정확한 표현에 신경을 써야한다.
본고 강화산성 시리즈 下편에서는 강화부성(강화산성) 안내문의 잘못된 부분을 적시하고 이의 영향을 받았을 몇몇 관련 인터넷 사이트의 설명 문안도 살펴 본 다음 새로운 안내문 시안을 제시코자 한다.
강화부성(강화산성) 안내판 무엇이 잘못됐나?
강화산성, 즉 강화부성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고려시대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잘못인데 그 고려시대 얘기 조차도 잘못되어 있어서 조목조목 살펴본다.
궁궐을 지을 때 함께 쌓은 성은 도성이 아니고 강도내성, 즉 궁성(宮城)이다. 도성(都城)은 강도중성(江都中城)을 말하는 것인데 1250년에 쌓았고 애석하게도 9년만에 헐리게 된 비운의 성이다.
강도의 내성,중성,외성은 1232년부터 1250년 사이에 쌓았으니 13년이 아니라 18년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해야 맞는다. 세 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각각 다르나 파괴되어 사라진 때는 1259년으로 같다.
앞 선 강화산성 시리즈 上편에 자세히 언급했듯이 강도내성은 1259년에 파괴되어 없어졌고, 현재의 강화산성은 1710년에 숙종이 강화유수 박권과 민진원을 시켜 신축한 성이다. 그러므로 고려내성을 현 강화산성과 연결짓는 것은 억지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고려내성에 해당하는 것이 현재의 강화산성이다."라는 안내문의 표현은 근거없는, 완전히 왜곡된 서술이다.
숙종 3년 (1677년)에 유수 허질(許秩)이 성을 수리(修築)했다는 사실을 인용한 문구로 보인다. 이것은 조선 전기 부성(朝鮮 前期 府城)을 말하는 것으로 세종 때 돌로 쌓은 성이 오래되고 낡아 숙종 때 보수공사를 했다는 것이다. 1710년에 신축된 조선 후기 부성인 지금의 강화산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부분이다. 고려내성과 조선 전기 부성, 그리고 조선 후기 부성(강화산성), 이 세 개의 성을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데 안내문에는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인터넷 사이트도 심각한 오류
● 강화군청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강화산성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자.
현지 안내판에서는 고려내성과 연결하여 견강부회하더니 여기는 고려中城을 강화산성과 연결시켜 놓았다. 몽고군의 강요로 헐렸다는 얘기를 하면서 바로 조선 초에 석성으로 개축했다고 나온다. 헐려 없어진 성이 어떻게 개축(改築)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어지는 문장도 조선 전기 府城과 조선 후기 부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 데 섞어서 설명하고 있다.
유수 박권과 유수 민진원이 성을 나누워서 완성시킨 것처럼 썼는데 정확한 서술이 아니다. 전임 유수 박권이 1709년에 착공하고 진행한 공사가 품(品)자형 3성이었는데 1710년 4월에 부임한 후임 유수 민진원이 설계변경을 관철하여 1성으로 다시 공사하는 바람에 박권 유수가 진행했던 공사는 전부 헛공사가 되어버렸으니 박권 유수는 강화부성을 착공했다라는 기록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강화산성 시리즈 上편 참조)
성의 완성 시점도 1711년이라고 했으나 비변사등록의 기록을 보면 1710년에 성은 이미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11년 4~5월에 숙종 임금께서 두 유수에게 축성의 공로를 치하하고 상으로 직접 숙마(熟馬)를 하사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를 완공 시점으로 잘못 봤기 때문에 생긴 오류이다.
현지 안내판에서는 2개라던 성문장청이 여기에는 4개로 되어있다. 조선시대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정체불명의 성문장청(城門將廳)이라는 기구의 출처가 어디일까? 궁궐 문을 지키던 수문장청(守門將廳)이란 기구는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회통 등에 나오는 조선의 정식 관청인데 이를 흉내 낸 듯한 성문장청은 강화성에만 있었을까? 이 네글자가 들어가 있는 문헌이 있는지 알고싶다.
● 강화나들이 사이트에 나오는 강화산성 설명문안
강화산성이 고려도성이라고 한 오류는 여기도 마찬가지이고 알 수 없는 말들로 짜깁기를 해놓았다.
-'궁궐을 건립할 때 도성 일부를 축조했고...'
-'1234년 1월부터 궁의 내성으로의 규모로 축성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주위 3,478척)로 지금의 강화성이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문안 작성자에게 설명 좀 듣고 싶다.
● 대한민국 문화재청 사이트도 한번 볼까요?
역시 여기도 강화산성은 고려시대 성이라고 간단하게 나와있다. 희귀하게도 성의 면적이 나와있다. 784,170제곱미터, 이 수치 가지고 성의 크기를 짐작하기는 쉽지않다.
● 네이버 백과사전
백과사전치고는 너무도 간단한 내용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기도 城의 면적이 나오는데 문화재청 사이트에 등재된 면적이랑 너무나 차이가 난다. 성의 규모(크기)를 나타낼 때는 보통 둘레로 표시한다.
● 남장대 안내판
최근에 복원된 남장대의 안내판 모습이다. 사진까지 곁들여 산뜻하게 만들었는데 내용은 그렇치 못하다. 오류가 반복되고 있는데 그 오류마저도 제각각 다르다. 1710년에 신축한 성을 여기선 개축이라고 해놨다. 개축(改築)이란 다시 고쳐 쌓는 것을 말하는데 신축한 성을 왜 고쳐 쌓았다고 하는지... 하여튼 왜곡의 몸통 "강화산성은 고려시대 성이다."라고 잘못된 주입된 선입관을 바로 잡지 않는 한 이런 어거지 서술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강화부성(강화산성) 안내문 시안(試案)>
강화유수부성(江華留守府城) - 사적 제132호
20세기 들어와 한동안 '강화산성'으로 잘못 불렸던 강화유수부성은 조선 숙종 36년인 1710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에 의해 완공된 성으로 조선 4대 유수부 중의 한 곳인 강화유수부를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석성이며 통상적으로 강화부성(江華府城)이라 부른다.
이전까지는 조선 초, 세종 때 쌓은 부성을 사용해 왔는데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겪으며 훼손된 것을 여러차례 수리하여 사용해 왔다. 고려 강도시대 궁성 터에다 쌓았기 때문에 당시 궁성(내성)의 모습과 규모를 어렴풋이 짐작케 해주는 이 조선 초기 부성은 280여 년이나 사용하여 너무 낡고 협소했다. 그러다 보니 더 크고 견고한 새 성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 대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물력이 많이 들어가는 대공사여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루워 오다가 숙종 대에 와서야 드디어 새로운 강화유수부성을 축성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도 예산부족과 설계변경 등의 문제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원래는 기존의 성(조선 초기 부성)을 수리하여 재활용하고 남산과 견자산에 작은 성을 쌓아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도록 하는 품(品)자형 3성으로 결정되어 축성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도중에 다시 남산, 견자산을 포함하는 1성으로 변경되어 결국 둘레 7.12Km에 달하는 석성으로 완성되었다.
후기 강화부성은 유수부(留守府)의 성이라는 것도 특별하지만 이 명칭 뒤에 숨어있는 더 큰 의미는 조선왕조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즉, 보장지처(保障之處)였다는 데에 있다. 전란시에 위급한 상황이 되면 왕은 강화행궁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이 행궁과 유수부를 지키는 1차방어선이 섬 둘레를 따라 49군데(당시)에 설치한 돈대(墩臺)이고 최후의 방어선이 바로 이 강화부성인 것이다. 숙종이 강한 축성의지를 보이고 내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 부성(조선 전기 부성)은 둘레 2Km 정도의 작은 성이었는데, 새 부성이 완성되자 점차 퇴락하여 취락지역으로 변했다. 새 부성은 둘레 7.12Km에 강화 읍내를 전부 포함하는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성이다. 동문(망한루), 서문(첨화루), 남문(안파루), 북문(진송루) 등 4개의 문과 네 군데의 암문을 가지고 있으며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석수문(石水門)인 상수문과 하수문이 있다. 전시 성곽전투 지휘소인 남장대, 북장대, 서장대가 있었는데 이 중에 장인대(丈人臺)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남장대(南將臺)가 2010년에 복원됐다.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 육전대와 처음으로 실전을 치루웠으나 유수 이인기가 도망가는 바람에 동문으로 공격해 온 프랑스군에게 점령 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1876년 운양호 사건 이후 진행된 조일회담 때는 군대를 이끌고 온 일본 대표단의 남문 입성을 허용해야 했던 아쉬운 근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201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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