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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비석
강화대교를 건너자 마자 좌회전(U턴)해서 조금 들어가면 오른쪽에 舊 강화역사관이 있고 왼쪽으로는 舊 강화대교와 연결되는 대로변 일대의 진해마을이 나온다. 그 초입에 커다란 비석이 서있어서 다가가 자세히 보니 "병인양요 강계포수 전첩 기념비 (丙寅洋搖江界砲手戰捷紀念碑)"이다. 순간 필자는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첫번째는 "강계포수 전첩 기념비라는 것이 왜 강화 땅에 서있는가?" 이고, 두번째는 1990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존재를 24년이 지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던 본인의 寡聞함 때문이다.
◈ 강계포수(江界砲手)
"조선 3대 색향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강계는 남남북녀라는 용어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명포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도 강계였으니, 조선시대에는 ‘강계포수’ 하면 호랑이도 놀라 물고 가던 황소를 놓고 달아난다 했다." 정비석의 '소설 김삿갓'에 나오는 장면이다. 옛부터 '명포수' 하면 강계였음이 소설 한 귀절로도 알 수 있다. 평안북도 강계군은 현재 북한체재에서 자강도 강계시가 됐다.
◈ 강계포수의 전첩?
戰捷紀念碑란 전투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1866년 강화에서 벌어진 병인양요의 정족산성 전투 때 500명에 달하는 강계포수가 프랑스군을 무찔렀다는 얘기가 적혀있는데, 당시 이 전투를 지휘한 양헌수 장군은 자기 휘하에 강계포수가 있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아무리 강계포수의 명성이 자자하다지만 병인양요 관련 기록에 전혀 나와있지도 않은 황당한 내용의 이런 전첩비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24년 동안이나 강화의 관문인 이곳 갑곶에 버젓이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양헌수 장군에게 죄스러운 일이고, 목숨바쳐 싸운 다른 고장 포수들의 명예를 폄훼하는 일이며 강화의 역사를 훼손함은 물론, 강계포수의 명성에도 스스로 먹칠을 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강계포수 전첩비의 내용
비문 내용을 여기다 옮겨본다.
『 조선조 고종(高宗)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자기나라 신부 九명이 참형된데 대한 응징을 구실로 불란서는 군함 七척으로 편성된 대함대로 우리나라를 침공 먼저 강화도에 상륙 공격하여 왔다. 이곳 정족산성(鼎足山城)에 포진하고 있던 순무사 천총(巡撫使 千聰) 양헌수(梁憲洙) 휘하의 정예부대 강계포수(江界砲手) 五백명은 밀려드는 불란서군을 맞아 일기당천의 기세로 신명을 바쳐 분전하니 적은 대패하여 황망히 물러갔다. 때는 一八六六년 10월 一九일이다. 이렇게 위급한 국난을 물리친 강계포수의 철석같은 충절과 불같은 용맹 그리고 혁혁한 공훈을 만세(萬世)에 현양하고 이를 영세토록 기리고자 그들의 후손인 강계군민들이 마음을 모아 여기 이 비를 세운다. 장하도다 그 충절! 빛나도다 그 공훈! 一九九0년 10월一九일 강계군민회장 양대길 명예강계군수 이승민 강계후인 김이현 짓고 쓰다』
많은 부분이 없는 얘기이거나 사실(史實)과 다르게 기술되어 있고 오기도 일부 눈에 띈다. 이에 병인양요 관련 사료들과 비교하여 그 왜곡의 정도를 지적하고 바르게 알려, 훼손된 강화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우선 병인양요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 병인양요의 진행과정
1866년(고종 3년),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 9명의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해군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왔다. 10월14일(이하 양력) 갑구지에 상륙한 프랑스 해군육전대는 진무사 兼 강화유수 이인기가 수성을 포기하고 도망 가버린 강화유수부성을 10월16일 손쉽게 점령한다.
서울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피난을 간다고 난리를 피우는 가운데 조선의 군부는 강화부성을 탈환하기 위한 태스크 포스팀 순무영(巡撫營)을 금위영 산하에 설치하여 순무사(巡撫使)에 이경하, 중군에 이용희, 천총(千摠)에 양헌수를 임명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선봉 중군 이용희와 천총 양헌수는 보병 5개 중대, 기병 1개 중대를 이끌고 강화도 갑구지의 대안(對岸)인 김포 통진까지 진출해 진을 친다. 여기서 기회를 살피던 양헌수 천총은 증원군으로 추가 투입된 370명의 향포수(鄕砲手)를 위주로 선발한 병력 526명을 이끌고 강화도 불은면 덕진(德津)으로 야간에 은밀히 상륙하여 약 4 Km 안 쪽에 위치한 정족산성에 입성하여 파수, 매복한다. 조선군이 잠입한 사실을 안 프랑스군은 올리비에 대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160명의 분견대를 정족산성에 보내 공격을 가해 온다.
11월 9일, 오전 10시경 부터 정족산성 동문과 남문 일대에서 시작한 전투가 몇시간째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오후 2시쯤에 이르러 70여 명의 사상자가 난 프랑스군은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점령 중인 갑곶 주둔지로 황망히 패퇴한다. 이 정족산성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 원정군은 다음 날인 11월10일 강화부성 점거를 포기하고 수원 풍도 앞바다로 물러나 며칠을 버티다가 11월21일 중국 산동반도 체푸港(지금의 옌타이煙臺)의 자국 극동함대 기지로 완전 철수한다.
◈ 병인일기의 존재
병인일기(丙寅日記)는 프랑스 함대가 2차 조선원정을 개시한 1866년 10월11일부터 12월 2일까지 50일간 양헌수 장군이 기록한 진중일기(陣中日記)이다. 양헌수 장군은 순무천총에 임명되어 강화도수복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마침내 526명의 병력으로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는 바, 이러한 군사작전 과정과 전투 내용을 매일 매일 일기에 적어 기록으로 남겼다. 병인일기는 직접 전투를 진두 지휘한 양헌수 장군의 전쟁일기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병인양요의 하이라이트인 정족산성 전투의 병력 투입 현황과 배치, 전투 진행과정 등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 병인일기만한 것은 없다.
◈ 병인일기의 향포수(鄕砲手)에 대한 부분 요약
▷ 10월 28일 - 관동,기읍 포수 370명 도착. 關東畿邑山砲手三百七十名來到
▷ 11월 02일 - 本陣上에서 관기포수(關畿砲手)의 능부(能否)를 시험해 보았다.
▷ 11월 05일 - 작전계획을 중군에게 상세히 보고하니 中軍이 크게 기뻐했다.이에 鄕砲手 367명, 京哨軍 121명, 標下軍 38명 (도합 526명)을 뽑아서 밤으로 면포대 250개를 만들게 해서 2인에 1개씩 각기 2일분 양식을 담아서 등에 짊어지고 가게 했다.
▷ 11월 9일 - 정족산성 전투 종료, 아군 전사자 楊根(양평)포수 尹春吉, 부상자 洪川포수 李邦元 외 3명 - 이 날 밤 12시가 다돼서 평양遊擊將 崔慶善이 關西포수 88명을 이끌고 도착 - 서울 訓鍊都監 병영에 江界와 北道의 砲軍이 도착해 있다는 보고 받음.
-「관동기읍 포수」, 혹은 「관기포수」는 강원도 포수와 경기도 포수를 가리키는 말이다.(關東 : 강원도, 畿邑 : 경기도)
- 작전병력 526명 중에는 정규군(경초군,표하군) 159명이 포함되어 있다.
- 유일한 아군 전사자는 공교롭게도 양헌수장군의 고향사람인 경기도 양평포수이다. 양장군은 무릎을 꿇고 곡을 한 후 고급 白紙로 염을 해줬다. 부상자 중의 한 명은 강원도 홍천포수이다.
- 전투가 벌어진 날 평양유격장이 지휘하는 관서포수 88명이 도착했는데 이미 전투가 종료된 지 한참 지난 후이며
이 시점에서 강계포수가 포함된 평안북도 포수들이 소집되어 서울 훈련도감에 와 있었다.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 제3책에 평안북도 관찰사가 강계 포수 100명을 모아 보냈다는 얘기가 바로 이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날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강계포수는 강화도 땅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으니 100여 명의 인원이 그저 먼 길을 오고 가는 수고만 했을 뿐이다.
◈ 강계포수 전첩비의 허구
다시 비문을 살펴보자
『 조선조 고종(高宗)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자기나라 신부 九명이 참형된데 대한 응징을 구실로 불란서는 군함 七척으로 편성된 대함대로 우리나라를 침공 먼저 강화도에 상륙 공격하여 왔다. 이곳 정족산성(鼎足山城)에 포진하고 있던 순무사 천총(巡撫使 千聰) 양헌수(梁憲洙) 휘하의 정예부대 강계포수(江界砲手) 五백명은 밀려드는 불란서군을 맞아 일기당천의 기세로 신명을 바쳐 분전하니 적은 대패하여 황망히 물러갔다. 때는 一八六六년 10월 一九일이다. 이렇게 위급한 국난을 물리친 강계포수의 철석같은 충절과 불같은 용맹 그리고 혁혁한 공훈을 만세(萬世)에 현양하고 이를 영세토록 기리고자 그들의 후손인 강계군민들이 마음을 모아 여기 이 비를 세운다. 장하도다 그 충절! 빛나도다 그 공훈! 一九九0년 10월一九일 강계군민회장 양대길 명예강계군수 이승민 강계후인 김이현 짓고 쓰다』
- 순무사 천총(巡撫使 千聰) 양헌수(梁憲洙) ==>양헌수는 순무사가 아니며(순무사는 이경하 대장) 천총의 聰은 摠을 잘못 쓴 글자
- 강계포수(江界砲手) 五백명 이하...==>허위, 날조된 부분이다. 신명을 바쳐 분전한 적도, 위급한 국난을 물리친 적도,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적도 없을뿐더러 500명은 더더욱 아니다. 강계포수 100명이 서울까지만 왔다가 그냥 돌아갔을 뿐이다.
- 때는 一八六六년 10월 一九일이다. ==>1866년 10월19일을 양력으로 쓴 것이라면 이 날은 통진에 진을 친 이튿날로 별무사 지홍관이 양헌수 장군의 격문(檄洋舶都主)을 프랑스군 진영에 전달한 날이다. 10월19일이 음력이라면 이때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강화와 통진에 있던 전 병력이 철수하여 서울로 입성하던 날이다.(양력 11월25일) 1866년 10월19일은 뭔가 잘못 알고 쓴 날짜이다. 정족산성전투 승전일은 양력 11월9일이다.
◈ 결론 및 요조치 사항
병인양요 정족산성 전투는 1866년 11월9일,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소집된 향포수 367명과 정규군 159명이 열강 프랑스군대와 목숨 걸고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인데, 강계군민회는 1990년 10월19일, 병인양요 강계포수 전첩 기념비(丙寅洋搖江界砲手戰捷紀念碑)라는 것을 만들어 강화읍 갑곶리에 세우면서 이를 강계포수 500명의 전공인 것으로 날조해서 비문에 새겼다.
- 강계군민회는 병인양요 정족산성 전투를 허위로 왜곡함으로써 양헌수 장군과 159명의 참전 군인 그리고 367명의 강원도, 경기도 포수의 명예를 심대하게 손상시킨데 대해 이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므로써 이들에게서 훔친 전공(戰功)을 하루 빨리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비변사등록 고종 3년 10월24일(음)조에 정족산성전투와 문수산성전투 참전 공로자 631명의 명단이 출신지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 강계군민회는 허위사실로 강화땅과 강화역사를 훼손시킨 것에 대해 강화군민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
- 강계군민회는 강계포수의 전공(戰功)이 허위임을 인정하고 강화읍 갑곶리 진해마을에 세워놓은 병인양요강계포수전첩기념비를 철거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사과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으며, 역사왜곡을 바로 잡고, 옛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강계포수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현명한 조치라 할 수 있겠다. (끝)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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