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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史探

강화도와 홍이포(紅夷砲) - 하

초록잉크 2019. 5. 4. 22:44

 

◆ 홍이포의 보유와 강화도 배치
 
1653년(효종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장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號가 제주도 해안에서 난파되어 헨드릭 하멜을 비롯한 36명의 네델란드人이 표류해 온다. 이 난파선에는 30문의 홍이포가 탑재되어 있었는데 이 중 일부를 건져 올렸다고 하멜은 표류기에 써 놓았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기록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 현종 5년(1664년) 6월 22일 4번째 기사 '강도 어사 민유중이 강화도의 미곡과 군기의 숫자를 아뢰는' 장면이 그것이다.

월곶(月串), 제물(濟物), 용진(龍津), 초지(草芝), 광성(廣城), 사각(史閣), 승천(昇天), 인화(寅火) 등의 각 보에 나누어 둔 것은, 흑각궁(黑角弓) 1천 3백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목궁 1백 50장, 장전 2천 1백 부, 편전 9백 부, 대조총(大鳥銃) 5백 84자루, 소조총(小鳥銃) 2천 1백 50자루, 대포 1백 79좌, 진천뢰 63좌, 남만대포(南蠻大砲) 12좌, 불랑기(佛狼機)포 2백 44좌, 화약 1만 6천 2백 근, 군향미 11만 2천 3백 47석, 콩 2만 8천 2백 28석, 조(租) 5천 4백 56석이었다. 호조에서 이송한 은(銀) 1만 3천 냥, 면포 10만 8천 필이었다.
 
이 기사에, 일반 대포 1백79좌에 이어서 표기되어 있는 '남만대포 12좌'가 11년 전 난파된 스페르베르호에서 수거한 홍이포이다. 강도어사 민유중이 이를 보고할 무렵 하멜은 동료 11명과 함께 여수 좌수영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선원 중에서도 고위 사무직인 서기(書記)였지만 원래는 포수(砲手) 주특기였다. 일행 중에도 포수가 몇 명 있었으니 이들이 홍이포를 수리하고  포술도 가르치고 했을 것이다.

1696년 이형상(李衡祥)이 숙종에게 올리기 위해 편찬한 강도지(江都志)의 군기(軍器) 항목을 보면 각 진(鎭). 보(堡). 돈대(墩臺)에 배치된 각종 무기류의 숫자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남만대포가 16좌로 나온다. 그러면서 "바다에 표류되었던 남만의 배에서 얻은 것"이라는 설명이 함께 있어 강화의 남만대포가 하멜의 홍이포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이로써 남만대포는 하멜 일행이 개량하여 만든 홍이포일 것이라는 추정이나, 이 홍이포를 바로 남한산성으로 보내졌다는 주장을 일축한다. 

 

★ 이 홍이포는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Gorinchem)市가, 표착 당시 스페르베르호에 있던 포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하멜기념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남만대포의 모습이며 당시 전형적인 함선용 포가에 장착되어있다. 하멜은 조선에 13년 체류 하는 동안 전남 강진에서 7년을 살았는데, 강진군은 이를 기념하여 2009년 하멜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그러나 요해지(要害地)에 배치한 무기로서의 효용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기사에서 보듯 주력화포 불랑기포를 비롯해 기존 화포의 수량이 월등이 많았으니 12~16門에 불과했던 남만대포는 그저 치장용이나 전시용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하여튼 조선이 최초로 보유했던 홍이포는 멀고 먼 바닷길을 건너 온 오리지널 네덜란드製였고 남만대포(南蠻大砲)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41년이 지난 숙종31년(1705년) 비변사등록 8월26일자 기사를 보면 얼떨결(?)에 보유했던 홍이포(남만대포)가 이 후 어떤 결말을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   

이달 24일 주강 입시 때에 지사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산성을 살펴보았을 때에 제도가 다른 대포(大砲)를 보고 장교들에게 물으니 이는 대체로 이른바 남만포(南蠻砲)로서 지난날 표류된 사람이 두고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이어 산성에 보냈습니다. 고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수어사로 있을 때 그 하나에 화약을 넣고 시험 발사해 보니 모두 파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남은 쇠로 불랑기(佛狼機)포를 주조하였고 지금도 한 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설령 이 포를 시험 발사할 수 있다하더라도 불랑기포나 현자포(玄字砲)처럼 긴요하지 못합니다.  -이하 생략-

2년 뒤인 숙종 33년(1707년) 2월 21일 기사에서는 지경연사(知經筵事) 조태채(趙泰采)가 입시하여 南漢山城의 南蠻砲를 해체하여 玄字砲를 주조하는데 있어 3門 중 1門을 남기는 문제에 대해 품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번 2월 20일 주강에 입시하였을 때에 지경연사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산성을 시찰하러 나가기 때문에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산성에 있는 남만포(南蠻砲) 3문(門)을 해체하여 현자포(玄字砲)를 주조하기로 전 수어사가 품의 결정한 바 있었으나 지금 들으니 2문은 이미 해체 주조하였고 1문은 미처 일을 시작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외국의 병기이고 보관해 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것을 파괴하여 다른 병기를 주조해보았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차후에 혹 그 제도를 상고하여 원용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1문은 우선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3문만이 남은 이 네덜란드 홍이포는 돌고 돌아 남한산성까지 오게 되는데 2문을 녹여서 현자포를 만들고 오직 1문만을 남겨뒀다. 이 때 이미 조선의 주력화포는 보유수량으로 보나 대신들의 언급으로 보나 불랑기포(佛狼機砲)임이 확실하고 홍이포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자총통,현자총통같은 조선 고유의 重화포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훗날 혹시 참고할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남겨 뒀던 네덜란드製 홍이포 1문은 소재가 묘연한데 남한산성 내 어느 골짜기에 묻혀서 발굴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장택상 별장의 현관 기둥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초지돈內 보호각(保護閣)에 진품이라고 전시되어있는 그 砲일지 모를 일이다.   



◆ 국산 홍이포 개발

1731년(영조7년) 9월21일 훈련도감에서 자체 개발에 성공한 홍이포에 대해 보고하는 장면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말하기를, "본국(本局)에서 새로 준비한 동포(銅砲)가 50이고 홍이포(紅夷砲)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輻)입니다. 동포의 탄환 도달 거리는 2천여 보(步)가 되고, 홍이포의 탄환 도달 거리는 10여 리(里)가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 나라에서 새로 제작한 것으로 예람(睿覽)하시도록 올렸으니, 청컨대 감동(監董)한 사람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를 보면, 홍이포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면서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당시 시험사격장이 도성 바깥 왕십리(往十里)의 수레재(車峴) 근처에, 그러니까 살곶이 다리 가기 전 현재의 한양대학교와 덕수고등학교 일대로 추정되는 곳에 있었는데  홍이포 개발부서인  훈련도감의 장붕익(張鵬翼) 大將이 여기까지 오가면서 직접 사격시험을 주관했다. 

홍이포 / 그래픽

◆ 시제품에서 멈춘 국산 홍이포
 
국산 홍이포의 시험발사가 성공해서 영조대왕에게 보고까지 하게 되는데 이는 1631년, 정두원이 明나라에서 홍이포 제본(題本)을 입수한 때로부터 정확히 100년만에 우리 손, 우리 기술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홍이포에 대한 더이상의 추가기록이 없다가 77년이나 지난 1808년, 순조의 명으로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홍이포가 다시 등장한다.

만기요람은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와 문장가 심상규(沈象奎)등이 나라의 군정(軍政)과 재정(財政)을 파악하도록 만든 정무 지침서로 왕을 위한 업무 매뉴얼이다.  여기 군정 2편에 5군영의 무기보유현황이 나오는데  훈련도감 군기(軍器)항목을 살펴보면 다른 무기들과 함께 홍이포 2坐가 재고로 잡혀있다.

【軍器】鳥銃八千二百三十九柄。行用銃七千九百四十六柄。內。四千四百三十八柄。軍兵分給。○別鳥銃一百五十四柄。長鳥銃五十柄。內。三層火門一柄。大鳥銃五十六柄。銅絲大鳥銃三十二柄。黑骨鳥銃一柄。 千步銃四柄。馬上銃二百五柄。銅砲一百十九坐。虎?砲十七坐。循環砲十坐。紅夷砲二坐。佛狼機六十五柄。四號十五柄。五號五十柄。 子砲三百三十五柄。銅小銃十一柄。三穴銃一百五十三柄。三當鞭一柄。四當鞭一柄。砲棍二柄。鉛丸一百八十萬九千七百九十二箇。子砲大丸六百箇。中丸六百箇。銅絲大鳥銃丸一萬四千五百三十六箇。大鉛丸三萬三千一百五箇。銅砲丸三千三百五十一箇。四號丸一萬八千七百七十箇。五號丸二萬四千一百五十箇。行用丸一百七十一萬四千六百八十箇。-이하 생략-  

다름 아닌 1731년산 시제(試製) 2문이 이때까지 그대로 훈련도감 무기고에 남아있는 것인데 이는 77년 동안 홍이포의 추가제작이 전혀 없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2문의 시제품을 만들어 기술적인 부분, 운영상의 문제 등을 다양하게 테스트하면서 제식화를 위한 과정을 진행했으리라 보는데 이후 양산하여 실전배치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성능이 뛰어난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홍이포는 당시 조선의 실정에 부합되지않는, 다시 말해서 제작비나 운영 유지비 같은 것이 너무 많이 드는..그래서 장점보다 단점이 더 부각되는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만기요람이 편찬되고 5년 후인 1813년에는 융원필비(戎垣必備)라는 조선 후기의 무기백과사전이 발간된다. 훈련도감의 박종경 대장이 쓴 책으로 당시 모든 화포의 제원과 사용법을 정리한 책인데 여기에 홍이포는 없다. 이후 56년이 지나고 병인양요를 겪은지 3년 뒤인 1869년에 훈련대장 신헌(申櫶)이 융원필비를 바탕으로 쓴 군사장비서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設)에도 역시 홍이포는 없다.  여기까지 살펴본 바,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 - 1653년 부터 약 50여 년간 네덜란드제 홍이포를 남만대포라는 이름으로 12문~16문 정도 보유했다. 강화도에 배치된 이후 거의 무용지물로 이리저리 돌다 손망실되고 일부는 불랑기나 현자포 주조에 재활용되기도 했다. 오직 한 문만 남겨뒀으나 현재 소재 불명.

둘 - 1731년 자체 기술로 국산 홍이포를 개발했으나 시제품 2문으로 끝. 이후 추가제작이나 실전사용 기록 전무.



통한(痛恨)의 홍이포


◆ 조선에 역대급 굴욕을 안겨준 홍이포 

영원성 전투 등에서 홍이포에 두들겨 맞아 본 후금은 1631년 무렵이 되자 직접 생산체제까지 갖추고 홍이포를 주력 화포로 삼는다.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이들은 1637년 1월 5일(양력) 12만8천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 온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청군에 속수무책인 조선 조정은 피난가기 바빴다. 

1월 9일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 등은 강화도로 가고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가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 앉았는데 청군은 이런 조선의 임금에게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한 홍이포로 위협을 가했다.  

2월19일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南隔臺) 밖에 또 7,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연려실기술)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실록)

1월 25일, 남한산성을 포위한 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청은 강화도 대안인 김포 통진에 청군 우익 병력을 포진시키고 강화도 공략을 준비한다. 20여 일 동안 상륙용 삼판선(三板船)을 만들고 홍이포까지 끌고 와 준비를 마친 청군은 2월 16일 드디어 강화해협을 건너 갑곶에 상륙을 감행하여 강화부성을 점령한다. 이때의 상황이 조선왕조실록 인조15년 2월 16일(음력 1월22일) 8번째 기사에 잘 나와있다.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留守) 장신(張紳)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 강진흔· 김경징· 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 강화도 갑곶에 전시되어 있는 홍이포는 제2의 삼전도비

천험(天險)의 요새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강화도가 홍이포 공격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700여 미터 폭의 강화해협 갑곶수로가 대형 해자(垓子)처럼 가로막고 있어서 웬만한 공격력 가지고는 물을 건너 상륙하기 어려운 곳인데 처음 접해보는 강력한 홍이포 공격에 갑곶을 수비하던 장졸(將卒)들이 다 도망 가버리니 적들이 쉽게 상륙할 수 있었다. 청나라가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 바로 홍이포였던 것이다. 

강화가 함락되니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성문을 굳게 닫고 있던 남한산성의 인조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졌다. 성문을 열고 삼전도로 나온 인조는 굴욕적인 삼궤구고두(三?九叩頭)로 청에 항복하게 된다. 칼레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성이 영국해군의 홍이포 153문에 의해 날아갔듯이 조선의 보장지(保障地) 강화도는 만주 여진족의 홍이포 몇 방에 처참하게 무너지면서 치욕의 역사 한 페이지를 만들고 말았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20년이 흐른 뒤에야 갑곶지역에 수비부대 제물진(濟物鎭)이 이전 배치되고 또 23년 후에는 해안 경계초소인 갑곶돈(甲串墩)이 주변의 여러 돈대와 함께 보강되었다. 강화도 전체는 다시 왕조의 보장지(保障地)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면서 방어를 위한 전술기지인 진보(鎭堡)와 해안 경계초소인 돈대를 섬 전체에 구축하고 동쪽 해안에는 방벽 즉 외성까지 쌓아 방어력을 더욱 높혔다. 이 중 갑곶돈, 광성보, 초지진 그리고 외성 일부가  1977년에 전사유적지(戰史遺跡地)로 복원,보수,정화된다.

 

위 사진은 1977년 10월 28일 강화전적지복원보수정화사업 준공식에서 역사학자 이병도가 갑곶에 포각(砲閣)까지 세우고 그 안에 복제 전시한 홍이포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무언가 설명을 하고있는 장면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다. 이 홍이포 때문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얘기는 분위기상 절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저 자리에 홍이포가 전시되지 못했을 텐데.. 그럼 하멜의 스페르베르호에 있던 남만대포 열댓문이 이 지역에 잠시 배치됐었다는 얘기는 했을까? 이병도는1930년대에 하멜표류기를 번역 출간한 적이 있으니 이 사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무슨 하멜기념관도 아니고 그 정도 史實이 갑곶돈 홍이포 전시의 의미가 될 수는 없다.

1978년 이선근 등이 집필하고 문화재청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江華戰史遺跡補修淨化誌)>에  "갑곶돈은 우리 민족이 외적의 침략에 줄기차게 싸우던 전적(戰跡)으로서 조국 수호의 정신적 교육의 터전이 되는 곳이다." 라는 언급이 있다. 그럴듯한 표현같지만 사실 이 속에는 부끄러운 역사의 진실이 숨어있다. 고려시대 몽고가 침입했을 때 버틴 것 말고는 위에 언급했듯이 병자호란 때 그리고 프랑스가 쳐들어왔던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의 관문 갑곶은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적에게 점령 당했던 곳이다.

특히 병자호란 때의 패배는 인적 피해와 함께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막심했기에 그때의 홍이포가 더욱 통한(痛恨)으로 다가온다. 갑곶돈지에 전시된 홍이포는 그래서 제2의 삼전도비(三田渡碑)라 할 만한 치욕의 대상물이다. 현재 잠실 석촌호숫가에 서있는 삼전도비, 다시 말해서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는 당대에 청의 강요에 의해 세워졌지만 제2의 삼전도비라고 할 수 있는 강화 갑곶돈지의 홍이포는 1970년대의 후대들이 스스로 세웠다는 데에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맺는 말

우리에게 홍이포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되짚어 보고 싶었고 갑곶돈지에 전시해 놓은 홍이포는 제2의 삼전도비라고 해도 될만큼 치욕스러운.. 그래서 거기 놓여 있어서는 안되는 역사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다 보니 글이 꽤 길어졌다.

공격만 당했지 남에게 쏴 본 적은 커녕 제대로 보유 해보지도 못했던 홍이포를 우리는  막연히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성능좋은 대형화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갑곶돈지, 광성돈, 초지돈, 남장포대는 물론 수원 화성(華城)과 19세기 말에 구축된 인천의 화도진(花島鎭)에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전시해놓고 있는 것이다.

수원화성 적대(敵臺)에 설치해 놓은 홍이포와 인천 화도진에 전시해 놓은 중국 스타일의 홍이포도 한마디로 넌센스라고 밖에 할 수 없다. 1879년에 신설한 화도진에는 흥선대원군의 특명으로 만든(1874년) 운현궁 대포,중포,소포만 전시하는 것이 맞다. 수원화성의 경우는 적대가 좀 썰렁하고 심심해 보이니 느닷없이 홍이포를 하나 올려 놓은 것 같은데 영조 때 만든 홍이포 시제품 2문이 화성으로 갔다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 그리고 홍이포는 화성(華城)의 북서적대나 북동적대같은 성첩(城堞)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 같다.

보면 알겠지만 화성의 적대는 홍이포 사격을 위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성첩 자체가 홍이포 발사시의 반동이나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파워가 몇단계 아래인 천자총통, 지자총통조차도 성(城) 위에서는 사용불가이다. 그래서 이런 대형 화포들은 거의 함선용(艦船用)이나 공성용(攻城用)이다. 성이나 돈대는 주로 현자총통이나 불랑기포로 지켰고 19세기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때도 광성보, 손돌목돈, 초지돈에서 실제 사용한 화포는 불랑기포(佛狼機砲)였다.  

이제 제2의 삼전도비 "갑곶 홍이포"를 어찌 해야할 지 생각해봐야 한다. 요즘 세간에는 중국의 부상과 맞물려  병자호란 다시보기 열풍이 일고 관련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갑곶돈지 홍이포가 간판을 대포로 바꿔 단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모두가 잘 몰랐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역사정보가 일반화, 보편화 되다보니 이제서야 "이건 아니네?~"하면서 감을 잡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판을 바꿔 다는 정도로 어물쩍 넘어가서는 절대 안될 일이다.

★ 조선군의 제식 화포, 4호 불랑기포(佛狼機砲)의 모포(母砲)와 자포(子砲) / 그래픽

갑곶돈은 복원의 첫단추부터 잘못 꿴 곳이라 근본적으로 손을 다시 대야 할 곳이지만 우선은 홍이포부터 철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 포각(砲閣)에다 우리 선조들이 갑곶돈을 비롯한 모든 돈대에서 실제로 배치했던 불랑기포를 1호부터 5호까지 규격대로 쭉 전시해 놓아야 한다. 여기에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을 곁들이고 불랑기포  발사시연까지 프로그램화하여 내방객들에게 보여 준다면 강화도의 관문인 갑구지(甲串)는 한층 의미있는 역사유적으로 거듭 날 것이다.

호국의 제일선에서 적과 맞서 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선조들이 어렵게 쌓아 온 역사를 왜곡이나 훼손으로부터 지켜내고 후손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일일 것이다.     


2014-08-27 00: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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