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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대표적인 국방유적지인 갑곶돈지(甲串墩址)와 초지돈(草芝墩), 광성돈(廣城墩) 그리고 남장포대(南障砲臺)에는 홍이포(紅夷砲)라는 대형화포가 전시되어 있는데 대부분 모조품, 복제품이다. 유일하게 초지돈에 전시되어 있는 1門이 진품이라고 하는데 그 출처와 제작년도가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 돈대를 복원하면서 그 시대에 사용했던 무기를 같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볼거리 제공 차원을 넘어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고증이 제대로 안됐거나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역사적 실체에 큰 손상을 주게 된다.
갑곶돈지에 전시된 홍이포의 설명판을 보면 도대체 이 홍이포는 언제 누가 만든 무기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왜 강화도 국방유적지에 전시해 놓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최근에는 명칭도 '홍이포(紅夷砲)'에서 '대포(大砲)'로 슬며시 바꿔놨다. 고유명사 '홍이포'를 일반명사 '대포'로 바꿨다는 것은 애매모호함으로 무엇인가를 가려보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1977년 이후 40여 년 가까이 홍이포였는데 이제와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드러낸 것인데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알려고 하지도 않는?) 홍이포의 가려진 프로필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의문의 역사현장을 바로 잡고자 한다.
홍이포(紅夷砲)는 어떤 무기인가
홍이포는 15~17세기 영국, 독일, 스페인 등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지역에서 사용하던 컬버린砲(Culverin포)가 그 원형이다. 나라마다 시기마다 규격과 디자인은 조금씩 달랐지만 긴 사거리와 강력한 파괴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대형화포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미사일 잡는 미사일 패트리어트(PAC-3)나 국산 탄도미사일 현무2-B 정도의 위상을 가진 강력한 전략 전술무기였던 것이다. 17세기가 되자 홍이포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아시아에 까지 전파되기에 이른다.
당시 거의 모든 화포가 그랬듯이 홍이포도 포구장전식(砲口裝塡式)의 평사포로 최대사거리가 4Km정도 되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700m 전후의 유효사거리에서 직경100mm 정도의 철환(鐵丸)을 직사(直射)하여 목표물에 강력한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무기였다. "폭발탄이 아니라서 위력은 약했다"고 자료들마다 한결같이 그렇게 써놨던데 현재의 기준으로 보니 그런 것이지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괴력을 갖춘 중화기였다. 이것은
요즘 전차포의 철갑탄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알아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적 탱크의 두꺼운 철판 장갑을 강력한 운동에너지만으로 뚫어 버리는 날개안정분리철갑탄(APFSDS)처럼 홍이포에서 발사되는 100mm 직경의 둥근 쇳덩어리는 성벽이나 건물, 함선 등을 직접 부숴 버리거나 적의 밀집 보병들을 쓸어버리는데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포의 길이는 2m가 좀 넘고 포신의 무게만도 1.8톤에서 3톤까지 나가는 대형화포이다.
웹(Web)에서 검색되는 각종 백과사전이나 문헌자료들을 보면『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라고 획일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홍이(紅夷)는 네덜란드라는 특정국가를 가리키기 보다 얼굴색이 붉거나 붉은 옷을 입은 유럽인들의 총칭으로 봐야하고 1600년대 초 明나라가 처음 홍이포를 도입할 때도 네덜란드에서가 아니라 마카오에 진출한 포루투갈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17세기 초, 중반 조선에는 두 무리의 외국인이 표류해 온다.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 일행인데 이들이 바로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 박연은 당시 첨단 서양무기인 홍이포의 존재와 화포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줬고, 26년 뒤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자신들의 난파선에서 수거한 네덜란드제 실물 홍이포를 수리하여 일선에 배치하고 그 조작술을 전수하는 등 최신무기 홍이포가 조선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이런 것들이 네덜란드를 부각시키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이포 또는 홍의포(紅衣砲)라고도 부르는 이 무기를 한 때 조선에서는 남만포(南蠻砲) 또는 남만대포(南蠻大砲)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네덜란드인에게서 얻은 포였고 네덜란드인을 남만인으로 칭했기 때문이다. 효종4년(1653년) 8월6일자 실록에서 박연과 하멜 일행을 남만인으로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중략-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홍이포의 사용例
◆칼레 해전
작은 섬나라 영국과 대제국 스페인 사이에서 벌어진 1588년의 칼레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사정거리가 긴 컬버린포 153문으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너뜨렸다. 이로부터 약 250년 동안 대포로 무장한 군함이 해양을 지배하게 되고 영국은 태양이 지지 않는 강력한 국가로 부상한다.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의 태동이 컬버린포 즉, 홍이포에서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네덜란드의 마카오 침공
1622년 6월 23일, 13척의 전함과 1300명의 병력을 실은 네덜란드 함대가 마카오를 공격했다. 당시 마카오는 150명 정도의 포르투갈 수비병이 배치되어 있었을 뿐 아직 제대로 수비 태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사전 포격 후 상륙한 800명의 네덜란드 군대는 사실상 도시를 거의 장악한 듯 하였다.
이 때 마카오를 구한 것은 말 그대로 신의 가호였다. 아직 반밖에 완성되지 않은 몬테요새에 설치된 포르투갈군의 홍이포가 운 좋게 네덜란드 함대의 화약고를 명중시킨 것이다. 이에 네덜란드 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이 때를 놓치지 않은 마카오 수비대가 역습을 가하자 네덜란드 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明과 後金의 영원성 전투
1619년 만주의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後金의 기세는 가히 노도와 같았다.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졌고, 50여개의 요새와 7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요하 동쪽에서 明나라의 영역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으며, 막강한 만주 기마군단이 산해관을 통과하여 중원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에는 계요독사(?遼督師)라는 직책을 가진 유능한 지휘관, 원숭환(袁崇煥)이 있었다. 후금을 막기 위해 산해관으로 가는 길목 100km 전방에 영원성(寧遠城)을 새로 축조한 그가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화력을 증강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여러 전투에서 위력을 입증한 서양의 신무기 홍이포를 포르투갈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마카오(澳門)에서 30문을 도입하여 북경의 도성과 산해관 등지에 배치했는데 원숭환은 산해관의 홍이포 11문을 영원성에 옮겨 재배치하고 후금의 공격에 대비했다.
1626년 1월 드디어 후금의 누르하치가 이끄는 13만 기병이 물밀듯이 쳐들어 오자 이에 맞선 明軍은 2만명의 병력과 11문의 홍이포로 대항한다. 원숭환의 탁월한 전술과 강력한 홍이포의 활약으로 결국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대패하게 되고 누르하치도 이 때의 부상으로 8개월 후 세상을 떠난다. 뼈아픈 패배를 통해 홍이포의 위력을 절감한 후금軍도 이 신무기에 눈독을 들이게 되고 다방면으로 노력한 끝에 결국 홍이포를 다수 보유하게 된다.
조선에서의 홍이포
◆홍이포에 대한 정보 입수
1627년(인조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 벨테브레이(박연)가 표류해 왔는데 이 사람이 조선에 귀화하면서 홍이포 제작법을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옛 문헌을 확대해석하여 생긴 오류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윤행임(尹行恁1762~1801)의 문집 "석재고(碩齋稿)"에 있는 그 부분을 살펴보자.
朴延者 阿蘭陀人也 崇禎元年 漂流至湖南 朝廷隷訓局 將降倭及漂漢人 延初名胡呑萬 工於兵書 能製火砲甚精巧 --중략-- 朴延爲國效其能 遂傳紅夷砲之制 奇哉
박연은 하란타(河蘭陀, 네덜란드)인이다. 숭정(崇禎) 원년에 호남(湖南)에 표류해 왔다. 조정에서는 훈국(訓局, 훈련도감)에 예속시켜 항왜(降倭)와 표류해 온 한인(漢人)을 거느리게 했다. 박연의 원래 이름은 호탄만(胡呑萬)이다. 병서에 재주가 있고, 화포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중략-- 박연은 나라를 위해 그 재능을 살려 드디어 홍이포의 제(制)를 전하였다. 기이한 일이다.
끝 문장 "遂傳紅夷砲之制 奇哉 드디어 홍이포의 제(制)를 전하였다. 기이한 일이다."
에서 "제(制)"는 제도(制度) 즉, 홍이포의 제원과 운용방법 정도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홍이포 만드는 법을 전하였다."로 확대 해석해서 인용되고 있다. '奇哉'도 '기이한 일이다!' 보다는 '기특한 일이다!'가 더 맞을 듯...하여간 이때는 조선에 아직 홍이포가 없었다. 카탈로그(Catalog) 상에만 존재하는 선망의 신무기였다.
1631년(인조 9년) 7월.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이 明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서양 화포(西洋火砲)ㆍ염초화(焰硝花)ㆍ천리경(千里鏡)ㆍ자명종(自鳴鐘)ㆍ자목화(紫木花)및 각종 도서(圖書) 등등을 올렸는데 이 각종 도서 중에 "홍이포의 제본(題本)"이 들어있어 이를 두고 조선이 명으로부터 홍이포 제작법을 도입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본(題本)은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뜻하는 말이니 이 역시 홍이포에 관한 카탈로그를 입수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육군박물관의 홍이포 설명문에는 아예 정두원이 홍이포를 서양 선교사로부터 얻어왔다고 써놨다. 홍이포라는 것이 외교사절의 짐보따리에 넣어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서양 화포(西洋火砲)"라는 것을 하나 얻어가지고 오긴 했는데, 이것을 포(砲)라고 해놓으니 요즘 사람들이 홍이포로 단정지어 버린 것이다. 서포(西砲)라고도 했던 이것은 기존의 화승식(火繩式) 조총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수석식(燧石式), 그러니까 부싯돌 점화방식의 조총(Flintlock Musket)이었음이 "국조보감(國朝寶鑑) 제35권 인조條"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엔 총을 화포(火砲)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조총수(鳥銃手)를 포수(砲手)로 칭했던 만큼 화약을 이용해 발사하는 무기는 통칭하여 포(砲) 또는 화포(火砲)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신무기 홍이포에 대한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조선 조정에도 입수되지만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바로 제작하지는 못한다. 뒤에 따로 언급하겠지만 직접 홍이포를 만들기 까지는 100년의 시간이 더 걸린다. 하드웨어 자체의 설계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어 보이지만 당시의 제철, 주물 기술로는 높은 압력과 열에 견딜 수 있는 포신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첨단 소재인 구리합금, 즉 청동을 써야하는데 구하기 힘든 수입품인데다 고가였다. 이런 고급소재가 포 1문 만드는데 1.8톤 이상이 소요되니 당시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령 만들었다 해도 군수지원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엄청나게 소요되는 화약과 100mm짜리 쇠포알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당시 군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국산 대포인 구경 120mm 천자총통이나 105mm 지자총통도 화약을 허비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군부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으며 천자총통의 경우는 임진왜란 이후 거의 도태 되다시피 한다.
선조33년 기록에 전투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현자총통이라고 했다. 한 발 쏘는데 들어가는 화약량을 보면 천자총통이 30냥(1.1Kg), 지자총통이 20냥이었으니 4냥만으로 한 발을 쏘는 75미리 구경의 현자총통(玄字銃筒)이 특히 해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지방 수영(水營)에 가장 많이 비축된 대포도 현자총통이었다. 7배나 더 많은 화약을 쓰는 천자총통이 그렇다고 위력도 7배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현자총통은 그야말로 賢者들이 선택하는 총통인가 싶다.
이러한 화포사상을 갖고있던 시대였기에 조선 군부의 홍이포에 대한 외면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선망의 대상이자 대형화포에 대한 신드롬까지 불렀던 홍이포였지만 우리에게는 못만든 측면과 안만든 측면을 같이 가지고 있던 혼돈의 아이템이었다.
*홍이포의 화약 소모량은,1696년(숙종22년)에 이형상이 편찬한 강도지(江都志)에 거의 유일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무려 5근14兩(3.5Kg)이나 된다. 군수 담당자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드는 천자총통(30兩)의 세 배가 넘고 조총(3錢) 313발을 쏠 수 있는 어마 어마한 양이다. - 하편에서 계속-
201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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