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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比古次의 의미와 역사

강화도(江華島)를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지명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甲比古次'이다.
많은 관련 학자들이 얘기 하듯이 甲比古次는 "움푹 들어간 곳의 입구"라는 뜻을 가진 고구려 지명
'갑구지'를 한자의 音으로 표기한 것이다. 삼국시대에 강화도 지역의 패권이 백제 고구려 신라로 이동하였는데, 신라 경덕왕(742∼765) 때의 한화(漢化)정책 이후 이 갑비고차를 뜻으로 푼 한자 '해구(海口)', '혈구(穴口)'로 바꿔 쓰기도 했고 나중에 축약형으로 변한 갑곶(甲串)이 등장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한반도 지도를 보면 서해 쪽 한 가운데에 움푹 들어간 강화만(江華灣)이 보인다. 여기에는 예성강, 한강, 임진강의 입구가 한 데 모여 바다로 향하고 있는데 그  앞을 커다란 방패처럼 가로 막고 있는 섬이 하나 있다. 남진정책을 쓰며 한강유역과 이남을 수중에 넣은 고구려 광개토태왕, 장수왕 때부터 사람들은 그래서 이곳을 '갑구지'로 부르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니 한자를 발음기호 삼아 甲比古次라고 썼다. 곧 '갑구지'는 음명(音名)이 '甲比古次'이고 훈명(訓名)은 혈구(穴口)이며 변명(變名)이 '甲串'인 것이다.

이 때만 해도 '갑구지'나 '혈구'는 강화 섬 전체를 가리키던 지명이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언제부터인가 강화도 내의 특정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변하게 된다. 강화도 동쪽 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루터를 갑곶(甲串), 갑곶진(甲串津), 갑구지 나루 등으로 불렀는데  섬의 관문 역할을 하다보니 당연히 섬 전체를 대표하는 장소가 되었고 여기에 지칭이 집중되면서 갑곶이란 명칭이 이 지역에 고착되었으리라 본다. 고려시대에 이미 이곳을 '甲串里'라 칭한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고  현재의 행정지명도 강화읍 甲串里이니 섬 전체를 가리키던 지명이 里 단위의 명칭으로 축소되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진성여왕 10년에 궁예가 쳐들어 왔었다는 혈구진(穴口鎭)은 강화섬 중앙부에 위치한 466m 높이의 혈구산(穴口山)에 그 이름을 남겨 놓았다.


甲比古次의 발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음차(音借)한 한자 '甲比古次'를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껏 당연한 듯 '갑비고차'라고 발음해 왔지만 '갑구지'의  '지' 발음을 '차(次)'로 쓴 것은 어딘지 어색하고 억지스럽다. '지'의 'ㅣ'모음 발음에 왜 'ㅏ'모음이 들어가는 次(차)를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비교언어학계의 원로 강길운(姜吉云) 전 충남대 교수의 저서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를 보면 해소가 된다.

이 책 251쪽에 " '次'의 고음(古音)은 [ci]이고 '古'는 [ku 〉ko]이니  '古次(口)'는 고구려 지역에서 [kuci 〉koci]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입(口)의 뜻을 가진 현대 일본어 くち(구찌)가 한반도에서 건너 간 고구려語  '古次'임을 알 수 있다. 次는 현대 漢語에서도 [ci]로 발음된다. 甲比古次를 지금까지는 '갑비고차'로 읽어왔지만 원래의 발음대로라면 '갑비구치'여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게 바로 강화사람들이 고대로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도 변함없이 일관되게 발음하고 있는 "갑구지'를 제대로 표현(音借)한 글자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갑甲' 또는 '갑비甲比'는 '움푹 들어간 곳' 다시 말해서 '구멍, 굴(穴)'을 나타내는 말이고 구치(古次)는  입, 입구(口)를 뜻하는 살아있는 고구려語이다. 오랫동안 강화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 온 이 화석같은 고귀한 지명은 이제 '甲比古次'로 쓰고 '갑구지'로 읽어야 한다. 한자 자체(字體)는 단순히 발음기호로만 사용된 것이어서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면, 원래의 발음과 의미를 담고 있는 '갑구지'가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잘못된 한자화(漢字化),  넌센스 스토리텔링
  
'갑비고치'의 발음을 축약해서 다시 한자로 변환시킨 갑곶(甲串)의 串은 우리나라 지형상에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곶'지형, 다시 말해 강이나 바다쪽으로 뾰죽하게 돌출된 땅모양을 연상시킨다.  장산곶,호미곶같은 곳이나 우리 강화도에 있는 철곶, 장곶, 북일곶, 용당곶 등이 그런 의미의 串이나 岬(Cape)지형이 맞지만  甲串은 이런 지형적인 의미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으니 혼동해서는 안된다. 甲串은 '甲比古次'의 古次(구치/고치) 부분을 발음이 유사하다는 이유만 가지고 곶(串)으로 잘못 변환시킨 왜곡된 명칭인 만큼 원래의 의미가 살아있는 이름을 찾아야 한다.

 

19세기 말 갑구지 나루의 모습. 왼쪽에는 강화도의 관문 진해루가 서있고 오른쪽 산등성이에는 진해루와 이어져 있는 외성 줄기가 보인다. 현재의 舊강화대교와 新강화대교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시대에 강화도 북쪽 해안의 승천포(昇天浦)가 관문 역할을 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한강유역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다툼을 벌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강화도의 들머리는 이곳 갑곶이었다. 육지와 연결된 강화대교가 지나가는 이곳 강화읍 甲串里 즉 갑구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강화도의 호적초본과도 같은 지명인데 '甲串'이라는 한자 때문에 오히려 그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오히려 혼동을 더욱 부채질하는 일을 우리 스스로가 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강화에서 발간된 각종 역사관련 서적을 통해 잘못 전해진 야사가 정설인양 변질되면서 이 왜곡된 스토리텔링이 각종 저서나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 확산되고 있는 이 야사는 시작부터 잘못된 스토리텔링이다. 갑옷의 뜻을 가진 甲자와 꿴다라는 뜻의 串자를 놓고 글 좀 안다는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몽고난 때 몽고병들이 "우리 군사들의 갑옷만 벗어 메워도 물길을 건널 수 있겠는데..."라고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던 곳이다. 그래서 갑옷 갑(甲)에 꿸 곳(串)자를 넣어서 甲串이라 하였다.」는 둥의 속설이 그것이다.

 

13세기 몽고 기마병(Mongol Warrior)의 모습. 저런 갑옷을 이어서 갑구지 앞바다를 메우려 했다니.. 거센 물살 등 악조건 하에서 강화대교 난공사로 애를 먹은 20세기 현대건설, 극동건설이 웃는다.

 

시대와 소속을 막론하고 전장에서 병사가 갑옷을 벗는다는 것은 전사했을 때나 패전 또는 투항했을 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부피가 나가는 물건도 아닌 갑옷을 가지고 글자 뜻에 견강부회하자니 이런 말도 안되는 스토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몽고병사를 바보로 만들기는 좋았지만 강화도의 호적초본 '甲比古次'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甲比古次라는 근원을 망각한 갑곶 스토리는 무의미하고 허망할 뿐이다.     
이 엉터리 스토리의 출처가 약 500년 전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이후가 더 문제인 것은 이 어처구니 없는 속설이 강화에서 발간한 모든 역사관련 자료의 갑곶 관련 항목에 반드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비중있게 써넣다 보니 잠시 쉬어가는 에피소드 개념의 스토리가 본의를 제치고 아예 정설처럼 인식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른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형국이다. 그 실상을 한번 살펴보자.

▶ 江都地名考(강화문화원 1992년) 109쪽
* 갑곳리(甲串里) 항목
<고려 고종이 천도하기에 앞서 몽고 장수가 강화를 공략하고자 하였을 때 강이 비좁아 갑옷을 꿰어 이으면 가히 건널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연유되어 甲串(갑곶이)로 되었다는 口傳이 있다.>
<옛 江華를 이르는 甲比古次가 와전되어 '갑고지'로 불리더니 俗語로 '갑구지'가 되어 民譚俗音이 되었다.>
 
▶ 증보 강화사(강화문화원 1994년) 852쪽
* 갑곶진(甲串鎭) 항목
갑곶진이란 이름의 유래를 보면" 우리 군사들의 갑옷만 벗어 메워도 물길을 건널 수 있다."라고 몽고군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갑옷 갑(甲) 꿸 곳(串)자를 넣어서 甲串이라는 설도 있다.
 
▶ 江都의 脈 (강화문화원 1998년) 79쪽
* 갑곶진(甲串津) 항목
갑곶이는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상고시대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 하였고 그 후 와전되어 '갑비고즈'로 변하였으며 또다시 '갑비고지'로 불리다가 전하여 '갑고지'로 굳혀진 것이며 이를 한문으로 갑곶(甲串)으로 되었다고 하였고  또한 일설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또는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김포 월곶면 대안에 다다라 해수로 인하여 도강 진격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르며 " 우리 군사들의 갑옷을 모두 한데 꿰어 다리를 만들어도 도강할 수 있으련만" 하고 탄식하여 그 말이 갑곶이가 되었다라고도 전해오는 전설이 있으나 그는 모두가 갑곶(甲串)의 글자풀이를 합리화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 신편 강화사 中권(강화군 2003년) 451쪽
* '제2장 관방 및 교통유적'의 갑곶진 항목
고려를 침공한 몽골의 한 장군이 강화를 공격하다가 돌아가 본국의 군주에게 "강이 좁아서 갑옷을 쌓아서 건너갈만 합니다."라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후 갑곶이라 하였다 한다.

강화와 관련해서는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서적들인데 지어낸 말에 집착하여 빼놓지 않고 언급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갑곶의 유래가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나마 江都地名考에서는 甲比古次가 '갑구지'로 되었다는 내용을 한 줄 첨가했고 '江都의 脈'에서는 "모두가 갑곶(甲串)의 글자풀이를 합리화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첨언해 놓았다. 그리고 뜬금없이 병자호란 얘기는 여기서 왜 나오는 걸까. 청군이 갑구지 앞바다를 건너와 강화성을 함락시켰던 조선시대의 아픈 역사를 팩트와는 거리가 먼 이런 장면에서 되뇌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강화대교가 놓이기 전인1960년대 갑구지 선착장의 모습. 상륙정(LCM)을 카페리로 사용하던 시절 사람이나 車들은, 우리가 '엠뽀도'라고 부르던 이것에 실려 뭍으로 건너갔다. 건너편 왼쪽 능선이 김포 문수산이다.

 

어쨌든 문제는 이런 자료들이 강화역사 연구의 출발점이 된다는 얘기다. 초학자는 물론 전공 학생이나 학자, 역사관련 집필자에서부터 블로거나 일반 네티즌에 이르기까지 이 자료들을 보고 확인하고 인용하며 글을 쓴다는 것이다. 이래서, Naming부터 잘못된 갑곶(甲串)이 그 유래마저도  몽고병사의 갑옷으로 잘못 굳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고구려語 "갑구지" 되살리기

위에서 살펴 본대로 甲比古次는 오랜 세월동안 핀트가 조금씩 어긋나면서 본의가 많이 퇴색되고 변질된 이름 갑곶(甲串)이 되고 말았다. 이를 원래의 이름 갑구지로 되살려야 한다. 물론 이 변명(變名)의 역사가 고려시대에 이를 정도로 깊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원과 본래의 발음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 몽고병 갑옷 스토리에만 매몰되어 있는 등의 문제점은 옛 문헌과 긴 연륜만으로 무마될 차원이 아니다.

더구나 1700여년 전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갑구지"가 현지 민간에서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오리지널의 DNA가 아직도 펄펄 살아있다. 필자의 어린시절 발음은 '가꾸지'였지만  왜 그렇게 부르는지 이유도 모르고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그 말이 고구려 때부터 전해 내려 온 귀중한 언어의 화석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그저 " 야~ 얘들아 오늘 가꾸지 앞바다로 멱 감으러 가자! " 했다. 그리고 한 50년 쯤 세월이 흐른 지금, '갑구지'를 정식 지명으로 복원할 것을 강력히 제안한다.

 

김포 통진 쪽에서 바라 본 갑구지의 모습. 왼쪽 舊대교 끝에는 갑곶돈(甲串墩)이 있었고 오른쪽 新대교 쪽은 카페리가 차들을 실어 나르던 선착장이 있었다. 저 두 다리 사이 가운데가 섬의 관문인 진해루와 갑구지 나루가 있던 곳이다.(사진:강화로닷컴)

 

甲口地 Ending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처럼 地名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꾸준히 변하고 있다. 그러나 지명은 의사 소통을 위하여 그 것을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정한 약속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갑구지가 갑곶이 되었다가 다시 갑구지가 되는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니 환원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본 모습을 되찾는 것이니 이것도 역사유적의 복원과 같은 개념으로 접근하면 될 것이다. 

갑구지의 한자표기는 甲比古次가 맞지만 현시대에서는 발음과 음절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요하다면 '甲口地'로 쓰는 것도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발음과 의미를 모두 충족시키는 모양새가 되니  강화읍 갑구지리 江華邑 甲口地里의 쓰임새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앞으로 증보될 江華史는 물론, 강화에서 간행되는 모든 역사관련 자료의 갑곶 항목 서술에는 甲比古次의 어원과 발음 / 표기의 변천과정 / 지명 대상이 축소된 현재의 사용 실태와 문제점 / '갑구지'로의 복원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왜?  갑구지는 일개 동리나 일개 나룻터의 스토리가 아니라 1700여 년 전부터 전해 내려 온 고구려 甲比古次의 히스토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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