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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0월 20일 쯤 돼서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고 찬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손돌바람, 손돌추위라고 한다. 손돌목이라는 강화해협의 좁은 물길을 공유하고 있는 강화와 김포, 특히 김포에서 지역 콘텐츠화하고 있는 손돌 뱃사공의 설화(說話)가 그것이다. 김포문화원 홈페이지에 올려진 내용을 보면
"손돌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으로,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워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조선시대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 동안 중단되었으며, 1970년부터 다시 진혼제를 지냈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낸다."
억울하게 죽은 손돌 뱃사공의 원한이 매년 그의 기일인 10월 20일이 되면 추운 바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가 소설(小雪) 즈음인데 첫눈이 오고 김장도 하는 때로 대개 첫 추위라 체감상 더 춥게 느껴지는 시기이다.
요즘이야 이런 설화를 믿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라는 책이 나온 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를 믿고 호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손돌의 무덤에 가서 진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물론 현재도 김포에서는 매년 손돌의 진혼제를 지내지만 지역의 홍보와 이미지업을 위한 이벤트성 행사에 더도 덜도 아니라고 본다.
손돌목, 뱃사공 손돌, 손돌바람의 키워드인 '손돌'에 대한 역사학적, 국어 음운학적, 지리학적 결론은 이미 나있다. 손돌 뱃사공은 가공의 인물이고 손돌은 사람의 이름이 아닌 지리적 형태를 표현한 순우리말임이 밝혀졌다. 고려 고종이 강화도 바닷길을 건너는 과정도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으며 배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강화해협 손돌목의 여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귀가 맞는게 없다. 어느 이름 모를 호사가의 엉터리 스토리텔링에 대대손손 우롱당하고 있는 느낌이라면 과민 반응일까?...
1866년 병인난 때 프랑스군에게 함락당한 강화도를 수복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통진에 가서 진을 쳤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초조하게 때를 기다리던 양헌수 장군도 손돌의 가짜 묘를 참배하면서 강화 덕진진 상륙작전의 성공을 빌었다. 천민인 뱃사공에게 양반 고위직인 양헌수 장군이 머리를 조아렸다니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노릇이다. 어쨌든 상륙작전은 성공했다.
잘못 짜여진 내용, 허무맹랑한 이야기임이 밝혀졌지만 설화(說話)로서의 명맥은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인근 지방으로 확산되며 변형 분화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콘텐츠를 필요로 하고 소비하는 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특히 관련분야 카피라이팅에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럴듯한 내용으로 원고지 일정 분량을 채워주는 에피소드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경우에 따라선 구비문학(口碑文學)으로까지 치켜 세우기도 한다.
역사학적, 국어 음운학적, 지리학적으로 허구임이 이미 밝혀졌지만 필자가 여기서 다시 지적하는 이유는, 설화 또는 구비문학이 하나의 장르를 이루며 민간의 창작욕이나 문학적 지평을 넓히는 긍정적인 부분 뒤에 역사적 사실, 학문적 진실을 왜곡, 호도하는 심각한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손돌'은 순우리말로 된 지명이다. 공간이 좁다라는 의미의 우리말에 '솔다'가 있다. 여기서 파생된 말이 솔기, 소나무, 솔바람, 오솔길 등이 있는데 다 좁다, 가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솔다'에 관형형 어미 '-ㄴ'이 붙어서 '손'이 되었고 여기에 '돌앙(도랑)'의 돌과 합쳐져 '손돌'이 되었다. '좁은 도랑'이라는 뜻이다. 기록하기 위해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좁을 착(窄), 돌 양(梁)을 써서 착량(窄梁)이다. 梁자를 지금은 들보의 뜻으로 쓰지만 1527년에 나온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 지리편을 보면 '돌 양'으로 나온다. 즉 도랑이란 뜻이다. 임진왜란의 격전지 명량(鳴梁), 노량(露梁), 견내량(見乃梁) 등이 다 좁은 물목이다.
고려 23대 왕 고종이 몽고의 난을 피해 강화도로 건너온 때는 1232년 7월 6일(음) 한여름이다. 손돌이 죽어서 찬바람이 분다는 10월 20일(음)하고는 거리가 멀다. 손돌이 가공의 인물이니 맞을 리가 없다. 그리고 고종이 배를 타고 건넌 지점도 강화도 북쪽에 있는 승천포(昇天浦)라는 포구이다. 고려사절요에 잘 기록된 내용이다. 지금은 여기에 고려천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아귀가 안맞으니 이 왕 저 왕을 거론하기도 하는데 고려시대 개경에서든 조선시대 한양에서든 어디서 출발하던 간에 강화도로 건너가는 뱃길을 남쪽에 위치한 손돌목으로 잡을 이유가 1도 없다.
손돌목 물길의 폭이 만조시에도 7~800m 정도에 불과한데 목숨에 위협될 만한 험한 물길을 느낄 겨를이 있을까 싶고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 때 조선 수비대 병력 대부분이 손돌목을 헤엄쳐 건너 퇴각했을 정도로 좁은 곳인데 물에 띄운 바가지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좁은 물목이라 물이 빠지는 간조 때는 유속이 빨라지긴 한다. 그러나 정작 손돌목 일대가 뱃길로서 부적합한 이유는 암초가 많아서이다. 빠른 물살은 만조가 되면 잦아든다.
손돌목이라는 지명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양상을 살펴 보면 13세기 고려시대 대몽항쟁을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을 때 가장 많이 등장한다. 이때의 표기는 100% 窄梁(착량)으로 되어있다. 조선 숙종 때인 1678년 병조판서 김석주가 작성한 강화도 돈대축조 입지선정 보고서인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에 처음으로 손돌항(孫乭項) 지명이 등장한다. 이곳에 세운 돈대가 신미양요 최대 격전지가 된 손돌목 돈대이고 이후 이곳 주변지역의 표기는 쭈욱 孫乭項 아니면 孫石項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을 바탕으로 손돌 설화의 생성,진화과정을 유추해 보자. 손돌목이라는 지명을 오랫동안 사용해 오면서 이곳을 오고 가는 뱃사람들을 중심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창작욕이 발동한다. 입에서 입으로 스토리가 텔링되면서 손돌을 孫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고 여기에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에 오래 전 왕까지 등장시켜 그럴 듯하게 살을 붙인다.
내친 김에 어느 돈 많은 호사가가 손돌목이 잘 내려다 보이는 해안가 돌출 언덕에 빈 무덤을 만들어 놓고 억울하게 죽은 손돌 뱃사공의 무덤으로 세팅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음력 10월 20일을 손돌의 기일로 정하고 제사까지 지낸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주는 장치를 추가하는데 이것이 바로 손돌 바람, 손돌추위이다. 완성이다.
말하기 좋고 듣기 좋은 설화가 나대면 그 뒤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학문적 진실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해서는 안됨을 강조하기 위해 장황하게 졸필을 휘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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