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순무는 우리나라 전체 순무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강화만의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하리만큼 강화 쪽에 치중되어 있어서 일반적이지 못한 특수한 작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순무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작물이다.
순무는 예로부터 바다생선 대구와 함께 어려운 시기에 비상식량 역할을 톡톡히 했던 식품이기도 하다. 제갈공명이 전쟁 중에 식량이 부족한 병사들에게 먹였다는 제갈채(諸葛菜)가 그것이고 1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은 감자흉년의 위기를 순무가루로 만든 힌덴부르크빵으로 넘겼다.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30여 종의 순무가 다양한 형태의 음식으로 인간들의 식단 한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순무만큼 오랜 세월동안 전세계적으로 꾸준히 소비된 식재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한자문화권에서도 菁(청), 蔓(만), 蕪(무) 등 순무를 뜻하는 한자만도 열 개 가까이 있는 걸로 보아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종류의 순무가 오래 전부터 재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강화순무의 역사도 상당히 깊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가장 오래된 관련 기록은 고려 때의 동국이상국집에 있다. 강화도 천도시기에 불은면 백운곡에 살았던 문하시랑 이규보는 직접 여섯가지 채소를 기르며 이에 대한 감상을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연작詩로 남겼다.
그 중에 "여름에는 장(醬)에 절인 순무장아찌로 먹고 겨울에는 순무짠지로 담가 먹는다"라는 내용을 담은 순무詩가 있다. 정2품 정도되는 고위관료가 자신의 텃밭에서 직접 채소를 길러 먹었다는 것이니 대몽항쟁 중이던 당시 강화도의 팍팍한 전시 생활상을 단편영화의 한 장면처럼 詩句에 담아냈다. 비슷한 시기에 역시 강화의 대장도감에서 간행한 의약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약재로 쓰이는 순무씨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더 많은 기록들이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지리지, 읍지, 의궤, 등록(謄錄) 등의 정부 간행물에서 부터 수많은 명사들의 문집(文集)과 저작물에도 순무(蔓菁)라는 단어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나온다. 물론 동의보감을 비롯한 조선시대에 발간된 거의 모든 의약서에도 순무나 순무씨의 효능에 대한 설명이 빠지지 않는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옛날 옛적의 순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위상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동의보감에 "순무를 쪄먹으면 곡기가 없어도 배고프지 않다"고 했듯이 비상시 구황식품으로, 여름에는 장아찌 겨울에는 짠지가 되는 요긴한 밑반찬으로, 급할 땐 거의 만병통치로 통하는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이 때의 순무는 21세기 지금의 순무와는 좀 달랐다. 우선 뿌리의 형태를 보면, 팽이 모양의 둥근 원추형이 당연한 지금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배추꼬랑지처럼 좀 더 길쭉하거나 작은 사이즈의 일반 무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지만 순무가 무는 아니고 식물 분류상 십자화目 십자화科 배추屬에 속하는 배추의 일종이다.
조선 영조 때 화가 최북(崔北,1712~1786)이 서설홍청(鼠齧紅菁)이라는 그림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생쥐 한 마리가 달달한 순무를 갉아먹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당시 순무의 생김새를 엿볼 수 있다.
지금의 순무맛은 겨자향과 인삼향이 섞인 듯한 알싸한 맛이라고 보통 표현하는데 이는 배추의 패밀리답게 배추뿌리의 맛과 비슷하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겨울에 순무를 한 점 베어 먹으면 배(梨)맛이 난다고 했다. 이때의 배는 산에서 자생하는 돌배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단단하고 사각거리는 저작감(咀嚼感)이 비슷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순무와는 모양에서 맛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요즘 종묘사에서 판매하는 순무씨의 패키지들을 보면 어느 나라에서 생산, 수입한 종자인지 상관없이 모두 한결같이 인쇄된 캐치프레이즈가 "재래종 강화순무"이다. 이는 우리나라 순무의 오리지널을 논할 때 강화순무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순수한 재래종은 존재하지 않지만 강화라는 지역 브랜드와 재래종이라는 셀링 포인트가 합쳐진 강화순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위치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그저 그랬던 순무가 언제부터 어떻게 강화만의 순무가 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팽이 모양의 보라색 순무가 되어 강화순무만의 달큰하고 알싸한 맛이 되었는지 알아보자.
<士官>
19세기 말 외세에 둘러싸인 조선의 고종은 해방(海防)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군을 근대식 해군으로 개편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해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이른바 사관학교를 설립하는데 그것이 바로 갑구지 진해루(鎭海樓) 안쪽에다 건립하고 1893년 9월에 개교한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이다.
지금은 빈터만 남은 이곳에는 통제영학당지(統制營學堂址)라는 팻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터와 팻말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긴 한데 '통제영학당'이라는 잘못된 이름을 붙여 놓은 건 커다란 실수.. 統制營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던 한산도 수군사령부의 명칭이다. 조선수군의 상징적 존재이니 붙여 쓸 수도 있다고 강변할 지 모르겠으나 근대식 해군으로의 개편을 추구하는 마당이고 당시 영국인들이 Royal Naval Academy 또는 Corean Naval College로 표기했던 것을 보더라도, 國名과 함께 외교문서에도 사용한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을 공식 명칭으로 써야 한다. 굳이 소속을 강조하고 싶다면 관할기관이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이었으니 '총제영학당'이라고 해야 차선책이 될 것이다.
한국해군의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된 조선수사해방학당(총제영학당).. 이제 강화순무 스토리에서도 빠질 수 없는 이슈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라고 하는 이곳이 순무역사에 있어서 아주 의미가 큰 변곡점이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불과 20여 년 남짓된다.
" 사관(士官)과 순무".. 무슨 영화 제목같기도 한 이 의외의 조합은 2000년에 발간된 해양사학자 김재승 선생의 역저(力著) '한국근대해군창설사'에 그 스토리가 근거자료와 함께 기록되어있다.
1894년 4월, 해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사관학교를 만들어 놓은 조선은 당시 패권국이자 해가 지지 않는 해양국가 영국에서 해군사관학교 출신 콜웰(William H. Callwell) 예비역 해군대위를 교관으로, 커티스(John W. Curtis)하사관을 조교로 초빙한다. 이들은 부부동반으로 조선땅에 부임하여 2년의 계약기간을 채우고 떠날 때까지 강화읍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관청리 250번지에 기역자 형태로 붙어있는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근처에 살던 젊은 조선인 부부가 그들의 살림을 도왔다고 한다.
지금은 유서 깊은 강화유치원이 자리잡고 있는 이곳 일대가 당시에는 살림집 주변으로 3,000여 평의 밭이 있어서 여기에다 콜웰 대위 일행이 영국을 떠나올 때 가지고 온 순무씨 등을 뿌려 몇몇 채소를 자급자족했다고 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루타바가種(Rutabaga)을 기반으로 하는 스웨덴 순무 스위드(Sweed)를 춥고 척박한 북쪽지방 특히 아일랜드쪽에서 많이 재배했는데 콜웰 대위가 바로 북아일랜드 출신이었던 거다.
평소에 먹던 순무를 머나먼 이국땅에서도 계속 먹고자 했던 콜웰 대위의 개인적인 작은 소망이 실현되면서 나비의 미약한 날개짓 같았던 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지금 21세기에 와서는 태풍으로 변해 우리의 입맛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강화순무 탄생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이 텃밭에서 재배한 루타바가 계열의 스위드 순무는 주변에 흔히 있던 재래종 조선순무와 타가수분(他家受粉)이 이루워졌을 것이고 이런 교잡이 반복되면서 재래종의 딱딱하고, 맵고, 알싸한 맛에 루타바가種 순무의 부드럽고 달큰한 맛이 합해지고 팽이 모양의 유전인자가 발현하여 강화 특유의 보라색 팽이 순무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콜웰대위 일행은 2년 만에 떠났지만 그들을 돕던 조선인 부부가 이를 계속 이어 온 덕분에 확고부동한 한국 대표 순무로 자리잡게 되었다.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갑구지의 조선수사해방학당은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를 매개로 탄생한 보라색 팽이 순무는 강화도 특산물이 되어 번창하고 있으니 우연히 맺어지는 인과관계가 역사의 프리즘을 통해 오래도록 영롱한 색으로 빛나고 있음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