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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은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돈대이다. 특별한 탄생비화 때문에 몇십 년 동안 서자 취급을 받으며 천덕꾸러기 노릇을 했던 돈대인데 독특한 지형에다 유려한 형태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 주변 풍광과도 잘 어울리는 돈대이다.
강화도 방어의 최전선을 담당했던 돈대들 중에서 외세 침략에 맞서 실제 전투를 치뤄 본 돈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신미양요 때 손돌목돈, 광성돈 그리고 용두돈(남성두南城頭)이 광성보 전투의 중심에 있었고 운양호 사건 때 초지돈 정도가 있다.
용두돈은 흔치 않은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 측면에서도 여타 돈대들보다 많으며 외형적으로도 볼거리가 많아 지금은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돈대가 되었다.
강화도에 있는, 있었던 54개 돈대 중 가장 나중에 생긴 돈대가 용두돈이다.
다른 돈대들이 전부 1679년~1726년 사이에 축조되었는데 용두돈은 19세기 후반인 1871년~1872년 무렵에 등장한다.
혹자들은 용두돈을 가장 마지막에 축조된 돈대라고 기술하는 사례가 있던데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용두돈은 기존에 있던 外城의 성두(城頭) 부분을 그대로 돈대로 지정한 경우이기에 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마지막 축조는 1726년에 지은 작성돈)
그래서 건축시방서(江都墩臺設築節目)대로 지은 기존의 돈대들과는 형태적으로 많이 다르다. 그냥 '강화도 유일의 19세기 돈대' 라고 하면 적절한 설정이 되겠다.
참고로 "城頭"는 성체의 변형인 치성(雉城), 곡성(曲城), 옹성(甕城), 용도(甬道)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용두돈 탄생에 관한 내용이 역사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인지 강화군은 1977년에 복원해 놓고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돈대인 양 아닌 양 갈팡질팡하며 전체 돈대 숫자에도 포함시키지 못하고 오랫동안 총 53개 돈대 라며 그릇된 주장을 해왔다.
최근에는 여러 조사를 통해 54돈대가 정설인 듯 기술되고 있는데, 돈대를 처음 만든 숙종조 당대에 전술적 가치가 없어진 양암, 갈곶 두 돈대를 정식 절차를 거쳐 취소시켰기 때문에 전체 돈대 숫자는 52개가 맞다.
돈대같지 않은 돈대.. 실체는 있으나 카운트를 하지 못하는 돈대 용두돈.. 지금도 그 앞에 서있는 설명문에는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 겸 포대 "라고 써놨다. 타이틀에 용두돈대라고 써놓고도 돈대를 돈대라 하지 못하고 초소, 포대라고 우긴다.
1977년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한 사람들이 없는 돈대를 억지로 만들어 이름 붙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돈대에 속한 돈대'라는 희안한 물건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직까지도 강화군 관련 부서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용두돈의 탄생 비화를 알아보자.
1871년에 미해군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 왔다.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이때 마지막을 장식한 광성보전투에서 어재연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대패한 끝에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난 후 해안 방어선을 재정비하면서 이때까지 남성두(南城頭)라 불리며 광성보의 목좋은 망대(望臺) 역할을 하는 정도였던 외성의 돌출부를 돈대로 격상시켜 '龍頭墩'이라 명명했다.
이곳이 손돌목 수로를 지킬 수 있는 최고의 요충지임을 실전을 통해 깨달은 후속 조치였음이라..
이러한 정황을 확인해 주는 자료가 바로 신미양요 이듬해인 1872년에 작성된 강화부 전도(江華府全圖)이다. 이 지도에서 최초로 용두돈이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이지만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중한 사료이다.
결국 용두돈은 신미양요라는 조미(朝美) 전쟁이 만들어낸, 특이한 이력을 가진 19세기 돈대였던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이 보관하고 있는 강화부전도는 2003년 강화군에서 발간한 지도책 "江華의 옛地圖" 40~41쪽에서도 볼 수 있다.
용두돈은 바다쪽으로 돌출된 암벽 위에다 바로 여장만을 쌓은 지축여장(只築女墻) 성채이다.
물건너 맞은편에는 통진의 덕포진(德浦鎭) 본진이 주둔하고 있어서 양면 협공이 가능하고 시계가 좋아 손돌목 수로 일대를 감제할 수 있는 곳이며 암초가 많고 물살이 세서 쉽사리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천혜의 요처이다.
현재, 용두돈에는 작은 포 두 문이 전시되어 있다. 지자총통이나 현자총통만한 전장식 화승포가 커다란 바퀴가 달린 포가에 장착되어 있다.
1980년, 건너편에 위치한 통진의 덕포진에서 포대지(砲臺址)를 발굴조사하던 중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운현궁에서 1874년에 제작한 중포(中砲) 한 문과 소포(小砲) 두 문을 발굴하였다. 이 운현궁 중포, 소포가 용두돈의 돈대 지정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덕포진과 용두돈 일대에도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현재 용두돈에 이 포의 모형품 두 문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상황과 화포의 수준을 살펴 볼 수 있다.
당시의 화포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는데..
초지돈, 광성돈, 덕진진의 남장포대, 갑곶돈에 전시되어 있는 홍이포는 당장 철거해야 하는 엉터리 무기들인데 비해 용두돈의 운현궁 중포, 소포는 사리(史理)에 맞는 진짜배기이다.
홍이포는 우리 조선군이 제식화포로 사용한 적이 없는 병기이며 오히려 적군이 사용했던 무기이니만큼 우리의 관방유적에서 눈에 띄면 안되는 금기 물건이다. 철거해야 한다.
돈대를 탐방하면서 항상 느끼는 점은 유적에 대한 유무형의 콘텐츠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홍이포같은 택도 없는 물건들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늘어 놓기만 해서도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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