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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史探

신미양요 3대 미스터리

초록잉크 2021. 6. 12. 16:26

미 아시아함대 기함 콜로라도호

1871년 신미양요가 발발한지 올해로 꼭 150년이 되었다. 미해군 아시아함대의 포함 두 척이 6월 1일(이하 양력) 수로를 탐측한다며 일방적으로 강화도 손돌목 수로에 진입하여 발생한 포격전, 6월 10일 미해군 전투병력 651명의 초지진 상륙과 이어지는 광성보 전투, 그리고 조선군의 지리멸렬과 미함대의 빈 손 철수까지의 과정은 그동안 여러 매체와 다양한 필자들에 의해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사실의 나열에다 과장과 축소 그리고 미화가 덧씌워진 일반적인 스토리 전개에서 벗어나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던 의문점 몇가지를 들어 분석하고 비판하고 반성하므로써 징비(懲毖)의 의미를 담은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군지휘관의 敵前 교체 미스터리-1

1871년 5월 19일 우리 해역에 진입한 미해군 아시아함대는 5월 31일 수로를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바로 다음날인 6월 1일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를 손돌목 수로에 진입시킨다. 이에 강화 진무영의 中軍 이봉억과 통진부사 홍재신은 각각 광성보와 통진의 덕포진에서 사전에 훈련한 대로 동시에 포격을 가해 결국 미해군의 포함 두 척을 물러나게 한다.

미함대의 침입을 그린 상상도인데 당시 저런 대포, 저런 포대는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날 이 포격전을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던 이봉억(李鳳億)중군을 교체하는 인사명령이 떨어진다. 그리고 후임으로 행호군 어재연을 새 중군으로 임명한다. 이 인사발령은 시간상으로 볼 때 포격전과 거의 동시에 이루워진 사항이다.
그러나 이런 엄중한 계엄하에서 현장에 익숙한 현역 지휘관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뒷전으로 물러나 있던 예비역으로 교체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인사이겠는가.. 물론 중군 이봉억의 임기가 다 되어가던 시점인 것은 맞다. 그것은 그만큼 지역 내의 군사적 현황을 훤히 꿰차고 있는 노련한 지휘관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긴급하고 위중한 시기임을 감안할 때 아주 이상한 인사이동이 아닐 수 없다.

미군이 상륙하기 5일 전인 6월 5일에는, 조미(朝美) 간에 손돌목 포격전의 정당성에 대한 문서 공방이 한창일 때인데 강화해협 초입을 지키는 초지진의 지휘관인 첨사 명석준(明錫駿)을 젊고 어리석다는 이유를 들어 교체한다. 적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인데 아랑곳하지 않고 전 첨사 이렴(李濂)으로 바꾼다.
덕진진의 지휘관은 공석 중이었는데 급히 현장에 있던 만호 배용구(裵龍九)를 임명한다.

점령당한 손돌목돈의 조선군 지휘부

첫번째, 진무중군(鎭撫中軍)의 인사는 신임 중군 어재연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했으니 완벽한 실패이다. 처음부터 이 전장에 바쳐질 제물로 기획된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어재연의 행보는 미스터리한 점이 있다. 두번째 초지첨사의 인사는, 새롭게 발령받은 첨사 이렴이 전장을 이탈, 도주하여 미군을 무혈상륙케 했으니 역시 실패다. 세번째 덕진만호 인사도, 만호 배용구가 수비병력과 함께 총 한 방 안쏘고 도주하여 미군이 덕진진을 무혈점령케 하였으니 이 또한 실패한 인사가 되었다.

人事가 萬事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꿰뚫는 진리이거늘 신미양요를 관통하는 세 번의 인사는 결과적으로 망사(亡事)가 되었다. 국가가 위급한 상황인데 이런 한가한 인사이동으로 불을 끄려 했다는 것이 납득 불가이다. 이 상황에서 어재연 중군은 자기 목숨 바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까..미스터리다.


형편없는 교전결과 미스터리-2

6월 1일 미함대가 수심을 재겠다며 손돌목 수로에 무단침입했을 때, 주력 모노카시호가 용두돈(당시는 南城頭)의 건너편에 있는 부래도 앞에서 암초에 부딪히는 바람에 한동안 옴짝달싹 못한 적이 있었는데 이걸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가 다 잡은 토끼를 놓쳐버린 일이 있었다. 부래도 바로 안쪽이 덕포진 주둔지였으니 방어부대 본진의 바로 정문 앞이었는데도 이걸 놓쳤다. 적함을 맞출 무기가 없었는지 군기가 빠진 것인지..만약 모노카시호를 여기서 격침시켰다면 초지진 상륙도 없었고 광성보전투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건으로 통진부사 홍재신이 징계를 받았다. 신미양요에서 유일하게 처벌받은 지휘관이지만 직은 유지했다.

미해군이 작성한 신미양요 작전지도. 윗쪽 Elbow Fort 앞에 Monocacy Struck Rock이 표기되어 있다.

조선군이 사용한 무기는 딱 두 종류로 보면 된다. 포병화기로 사거리 약 120m의 불랑기포가 있었고 개인화기는 전장식 화승총(조총)이었다. 사거리가 훨씬 긴 대조총이 극소수 포함되어 있었고 환도나 각궁,편전같은 최종병기도 있었으나 부무장에 불과하고 결과적으로 크게 활용되지 못했다. 이러한 조선의 무기들의 스펙이 열악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양측 병력 1,700여 명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 뒤엉켜 2시간 동안이나 치고 받은 전투에서 전과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은 불가사의다. (미군 전사 3명)

무기 성능이 좀 떨어지더라도 그것을 능숙하게 다루는 잘 훈련된 병사와 지형과 상황에 맞는 전술구사, 방자(防者)의 잇점을 잘 살린 진용 구축 등, 노련한 지휘관이 나서서 천금같이 주어진 열흘 간의 대기시간에 준비를 제대로 했더라면 군진이 지리멸렬 괴멸되고 사령관 이하 53명(미군 주장 243명)이나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공격해 온 침략자들에게 견디기 힘든 피해를 줄 수 있었는데..미스터리다.


양측 발표가 다른 전사자數 미스터리-3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선군의 전사자 수는 53명이다. 미군 전사자 수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고 다만 포로로 잡혔다가 구출되어 온 병사가 미군 전사자 시체 3구를 봤다는 증언이 기록되어있다. 그외 전투현장에서 살아나온 별무사 이학성(李學成) 의 보고 내용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중군은 직접 칼날을 무릅쓰고 대포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선두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김현경은 손에 환도를 잡고 이쪽저쪽 휘둘러대며 적을 죽이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하 略-」라는 기록이 있는데, 미군을 무수히 죽였다는데 도대체 몇 명 죽였다는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미군의 전사자가 3명뿐이라는 것은 확인된 사실인데 무수히 죽였다는 미군은 무슨 미군인가? 미스터리다!

미함대 기함 콜로라도호 갑판에 빼앗긴 수자기가 걸려있다. 오른쪽이 해병대 중대장 틸튼 대위

미해군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의 보고서에는 조선군 전사 243명, 미군 전사 3명으로 기록되어있다. 조선군 전사자 수가 양측 발표에서 큰 차이가 난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공식 기록된 53명을 믿고 싶다. 미해병대 중대장인 맥클레인 틸튼 대위가 서한에 남긴 기록에도 틸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시체는 50구 뿐"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53명이 더 신빙성이 있다.

그러면 나머지 190명 정도 플러스된 숫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기본적으로 전과를 부풀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고 바다로 뛰어든 조선군을 전부 전사자로 집계했을 수 있다. 미군측에서는 광성보 앞바다 물 속으로 뛰어든 조선군을
미군의 공세에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다 익사하거나 자살한 것으로 본 기록이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광성보의 조선군은 미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바다를 헤엄쳐 건너편에 있는 통진의 덕포진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이를 두고 진무사 정기원은 "진을 덕포진으로 옮겼다"는 교언으로 위장을 했지만 필자가 전선 무단이탈, 집단 도주로 보는 이유는 광성보 언덕위, 수자기를 걸어놓은 손돌목돈에 최고지휘관 어재연 중군과 차석 김현경 천총 등의 지휘부가 적과 교전하며 버티고 있는 중이였기 때문이다.

광성보 전투가 끝난 직후, 파괴된 용두돈(당시에는 南城頭) 일대의 모습

이 전장에 투입된 조선군의 병력이 강화 진무영 병사 400명, 中軍 어재연 장군이 부임할 때 데리고 온 경군(京軍) 600명..도합 1,000명이었는데 이 중 53명이 전사했으니 나머지 947명은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얘기일까.. 한마디로 이름만 군대이지 오랫동안 전쟁이 없던 시기의 군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1871신미양요이다. 평화시에도 방심하지 않고 항상 훈련하며 상무정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150돌을 맞은 신미양요를 징비하며 다시 한 번 일깨웠으면 좋겠다.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할 것이다.(予其懲而毖後患)”
서애 유성룡이 시경(詩經)에서 직접 발췌하여 쓴 『징비록』의 집필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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