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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史探

19세기 강화읍내를 산책하다

초록잉크 2019. 4. 25. 19:00

19세기 중엽에 그린 강화부내 지도인데요 이 지도를 따라 그 시절의 강화읍내를 한바퀴 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도 맨 위에 있는 上營은 상아(上衙)라고도 표기하는 강화유수의 집무처인 강화유수부 동헌입니다.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이 있는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강화군청으로도 사용했던 곳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옆에는 객사(客舍)가 있는데 조선시대 지방관아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관청입니다. 객사(客舍)라는 명칭에서 보듯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곳이지만 건물 중앙의 정전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고, 지방 고관이 부임하면 먼저 이 곳에 들러 배례를 올리던 곳입니다. 해구보장지관(海口保障之館)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강화객사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불질러 없애버렸습니다. 강화유수부를 제대로 복원한다면 가장 우선시 해야 할 건축물입니다.

그 아래 강화초등학교 자리에 포량창(砲糧倉)이 표시되어 있고 옆 쪽으로 이아(二衙)가 있습니다. 여기는 강화유수 밑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종4품의 경력(經歷)이 근무하던 사무실입니다. '경력'(經歷)이라는 단어가 지금은 이력, 커리어Career 등의 뜻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관직명 중의 하나였습니다. 현재 강화유수부의 이방청(吏房廳)이라고 부르는 건물이 이 이아(二衙)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아'(二衙)라는 원래 명칭을 놔두고 왜 엉뚱하게 '이방청','이방청'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파악해 본 바로는 조선시대의 지방관아에 이방청이라는 조직이나 관청명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유적지의 하나로 자주 소개되는 강화유수부 이방청은 하루빨리 원래 이름으로 복원되어야 하겠습니다.

밑으로 쭉 내려오면 강화성공회로 가는 성마루 시작 부분에 종각이 있습니다. 조선 초기 부성의 남문이 있던 자리로 병자호랑 때 김상용 선생이 자폭 순국한 곳입니다. 열무당 옆으로 개천 건너에는 中營이 있는데 지금강화읍사무소가 있는 자리입니다. 그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진무영(鎭撫營)이라고 표기해놨습니다만 좀 더 정확히 애기하면 진무영 中軍의 집무처이죠. 사단장실이 있는 곳이 사단 사령부이듯이 진무영의 최고 지휘관이 있던 곳이니 진무영 본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기 중영에서 1876년 1월 朝日예비회담을 보름 여 진행하였지요. 그리고 병자겁약(丙子劫約)을 체결한 장소인 연무당(練武堂)이 서문 옆에 외교장(外敎場)으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이 외교장이 동문밖 강화중학교 자리에 있을 때는 동교장(東敎場)이라고 불렀지요.

자 이제 내수골로 들어가 볼까요? 잠궁(潛宮)이라고 표기한 곳이 철종 임금이 성장기를 보낸 용흥궁이구요. 그 옆에 있는 별영(別營)은 별효사청 별영(別驍士廳 別營)을 말하며 별효사는 기마병들로 구성된 별동부대인데 別營은 이들이 주둔하고 있는 병영입니다. 지금의 강화경찰서 자리로 원래는 궁궐의 소요물자를 조달,공급하는 내수사(內需司)가 있던 곳이어서 이 골목에 연한 동네를 내수골이라 부르고 있지요. 우리 학창시절 유도 도장으로 쓰였던 경찰서內 심도관(沁都館)이 이때의 유적 일부로 짐작됩니다만 이젠 헐리고 그 자리에 강화경찰서 청사가 들어섰지요.

견자산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제가 살던 '살채'라고 부르는 동네가 나오는데 여기엔 동영(東營)이 있군요. 별효사들의 동쪽 병영인데 훨씬 전 고려시대에는 용동궁(龍東宮)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의 강화군청 일부와 '홍성효','이현일'친구의 집 일대로 추정됩니다. 우리집은 바로 윗쪽이었구요..20세기 초에는 강화 진위대 참령 이동휘(후에 임시정부 국무총리 역임)가 이 자리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필자를 비롯한 홍성효, 박기일, 유충식, 이현일 등의 친구들이 살던 옛집 일대가 궁궐자리, 특수부대 주둔지, 사립학교 자리로 이어지는 명당자리였음이 역사적 사실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구석살채'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에는 별파진청(別破陳廳)이 있습니다. 별파진은 포병(砲兵)부대로 각 영에 중대규모의 병력이 편성되어 있었으니 별파진청은 포병중대본부로 보면 되겠습니다. 불랑기포로 훈련하는 병사들을 구경하면서 조금 더 오른쪽으로 가니 성벽 아래 쪽으로 연결된 하수문(下水門)이 나오는군요. 西出東流하는 동락천의 물이 강화해협을 향해 흘러 나가고 바로 너머에는, 외지인이 남문을 통해 강화성내로 들어오려면 꼭 건너야 했던 토끼다리(兎橋)가 보입니다. 우리시대에도 철도 침목처럼 시커먼 콜타르가 칠해진 나무다리였던 이 곳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지요. '토끼다리'라고 이름 붙여진 유래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아쉬워 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본 19세기 강화읍내 산책을 마칠가 합니다.

맨 위의 지도와 1872년에 촬영된 이 사진은 거의 같은 시기의 것이라  지도에 표기된 곳과  실제 모습이 잘 일치하고 있습니다.

2008.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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