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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대 강화유수 이의익

 1627년 1월, 만주에서 3만의 후금軍이 쳐내려 오자 인조임금은 강화로 피신합니다.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던 조선은 두 달 후 정묘조약을 체결하고 끝낸 이 정묘호란을 계기로  보장지처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된 강화를 강화유수부로 승격시킵니다. 지금의 국장급인 종3품 도호부사가 차관급인 종2품 유수로 격상되면서 강화의 방비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 이 해에 임명된 초대 유수 鄭孝成으로부터 1895년(고종32년) 마지막 유수 申正熙까지 268년간 237명의 유수가 강화를 거쳐갔습니다. 이 중 오늘 소개할 분이  204대 강화유수 이의익(李宜翼)입니다.

 

사모관대를 하고 고급 나무의자에 앉아 45도 얼짱각도로 위엄과 기품과 예우가 엿보이는 독사진을 찍은 이 분이 1857년에 강화유수를 지낸 이의익(李宜翼)공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3년 전이고 필자가 태어나기 약 1세기 전이며 강화도령 철종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신지 8년째 되는 해입니다.  어떻게 조선시대 강화유수의 사진이 남아 있는지는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이 분 소개를 하겠습니다.

수원 화성을 막 쌓기 시작하던 1794년(정조 18년), 서울 회현방(회현동)에서 출생한 이의익은 본관이 광주(廣州)이고  자는 문약(文若)으로  헌종 14년(1848)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거승지(對擧承旨)로 가자(加資)되었으며 강화유수 외에 이조판서,공조판서,경기관찰사,판중추부사 등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치고 1883년, 당시로서는 상당히 드문 享年 90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강화유수 재임시 이 분의 나이는 64세였지만  위의 사진은 70세 때에 촬영된 모습입니다. 당시 나이 일흔은 드물기도 했거니와 거의 반 송장 취급받던 시절인데  꼿꼿하고 정정한 자태와 주름살 하나 없는 동안이 매우 놀랍습니다.

이 때는 강화도령 철종의 시대

이 분이 강화유수로 재임하던 1850년대의 분위기를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의 세도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철종임금께서도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펴지 못하던 시기였구요. 방랑의 세월로 시대를 풍자했던 김삿갓(김병연)이 활약(?)하던 때입니다. 그러고보니 김삿갓도 안동 김씨네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수해에 흉년까지 겹쳐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고 도적이 횡행하던 아주 혼란스런 시기였습니다.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일본은 구미 5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중국(淸)은 태평천국의 난과 영국, 프
랑스에 의해 광동이 점령당하는 2차 아편전쟁 중이었으며 미국에선 재봉틀이 발명되고 뉴욕타임즈가 창간됩니다. 영국에서는 세계만국박람회가 열렸으며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고 백의천사 나이팅게일이 크림 전쟁에서 활약합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발표하고 파스퇴르가  효모를 발견합니다. 독일에서는 선사인류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이 발견되고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가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가면 무도회'같은 오페라를 만든 때입니다.


연행사와 사진과의 만남


1862년(철종 13년)  10월, 對淸외교사절단인 연행사(燕行使)의 正使로 청의 수도인 燕京(지금의 북경)을 방문한 이의익은 5개월여의 체류일정 막바지(1863년 3월)에 러시아 정교회 전도단의 주선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사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찍게 됩니다. 

유럽에서는 1840년대에 이미 실용화 단계에 들어선 사진이지만 극동의 은둔국 조선에서 온 사신들에게는 환상의 마술이요 미지의 첨단기술이었기에 상당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정사 이의익의 수행비서로 따라 온 이항억(李恒億)은 연행사 일행의 행적을 연행초록(燕行抄錄)에 기록했는데 여기에 이런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사진찍기 이벤트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同行中 年最高 故先使寫眞 (동행 중 내가 나이가 가장 많기 때문에 먼저 사진을 찍게 되었다)" 라는 구절에서 사진(寫眞)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이 단어의 始源이 되었고  의관정제(衣冠整齊)하고 찍은 정사 이의익의 독사진은 한국인을 모델로 한 최초의 인물사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위 단체사진에 나온 15명은 3使臣(정사,부사,서장관)의 수행원인 역관(譯官), 의원(醫員), 화원(畵員) 등의 하급관리들로 보이는데 포즈와 표정들이 너무 자연스럽고 당당한 모습입니다. 새로운 문명과의 첫만남에 저으기 당황했을 터인데도 주눅들지 않고 곧바로 적응하며 즐기는 모습에서 한민족 특유의 유연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역관 박명홍과 군관 오상준

셋이서 찍은 이 사진도 전체 구도나 모델들의 포즈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19세기 중반, 사진 초창기 시대의 사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작품입니다. 볕이 잘 드는 이른 봄날, 건물기둥 모서리에 인물들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촬영한 러시아 사진사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장면이지요. 툇돌에 앉아있는 사람이 판관 박명홍(朴命鴻)이고 군복을 입고 장죽을 물고 있는 사람은 군관 오상준(吳相準)으로 보이는데 연행초록을 쓴 이항억이 특별히 이 두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봐서 틀림없으리라 봅니다. 

박명홍은 당시 54세의 사역원(司譯院) 소속 중국어 통역관이며 직급은 정5품 판관이니 웬간한 고을의 현령과 같은 품계입니다.  군관 오상준은 20대의 젊은 나이로 보이는데 날카로운 눈매에 장죽을 물고 있는 의연한 자세에서 19세기 조선군인의 포스가 느껴집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장교를 군관이라고 하지만 조선시대의 군관은 장교는 아니고 지금의 부사관급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로부터 21년의 세월이 흐른 1884년, 이 젊고 패기에 찬 군관 오상준은 강화유수부 판관이 되어 강화읍 신문리에 지금도 남아있는 남관제묘(南關帝廟)를 건립했으며 1889년(고종26년)에는 친군심영(親軍沁營)으로 명칭이 바뀐 강화 진무영에 영관급 고위장교인 우령관(右領官) 으로 발령 받는 등, 강화와 진한 연을 맺게 되는 사람입니다.

맺음말
 
위의 사진들은 1861∼64년 베이징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했던 영국인 윌리엄 로크하트가 수집한 것으로 그는 1892년 이 사진들을 런던선교회에 기증했고 현재 런던대 동양·아프리카 연구학교(SOAS)가 위탁 보관 중입니다. 연전에 국내 한 사진학과 교수가 이를 발굴하여 각종 매스콤에 발표했었는데 한국인 최초의 인물사진이라는 기사내용이어서 굉장히 흥미를 가지고 읽었습니다.

이 옛날 사진들을 신기한 눈으로 살펴보던 필자는 여기에 강화와 관련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초점을 맞춰 재조명해 보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갖가지 역사가 다양하게 얽혀있는 역사의 보고답게 사진의 역사에서도 우리 강화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촬영지도 신미양요(1871년) 때의 강화도이니 말입니다. 

201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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