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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史探

강화의 황성옛터를 아시나요?

초록잉크 2019. 4. 25. 19:16


최근에 '강화산성 복원계획'이 메스콤을 통해 발표가 됐다. 고려시대,그러니까 몽고가 침입하여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했을 당시(1232년) 강화읍에 축성되었던 성을 복원한다는 계획인데 특히 남한지역 유일의 고려유적의 복원이라는 콘셉이 눈길을 끈다. 강화군은 "계획에 따라 2009년에 9억원을 투입해 성곽 및 남장대 복원을 시작으로 오는 2012년까지 연차별로 총 600억원의 예산을 들여 강화산성을 고려궁 수비성곽으로 복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는데 이 계획에는 꼭 짚어봐야 할 문제점들이 있어 여기에 제시한다 . 
 

1. 강화산성은 고려성이 맞나?
 
강화산성을 고려궁 수비성곽으로 복원한다고 했는데 17세기 당시 조선왕조의 방어전략과 개념에 입각해서 신축된 조선시대의 성을 강도시대의 고려궁성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강도江都시대(서기 1232년~1270년)에 강화에는 몽고에 항전하기 위해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을 축조하였는데 내성은 城줄기가 송악산(북산)에서 내려와, 東門이 있던 성마루(성공회 성당이 있는 언덕)를 지나 현재 '선원선생 비각' 자리에 있던 南門(승평문) 으로 이어지고 다시 성광교회가 있는 언덕을 돌아서 향교 앞 하마비下馬碑 자리의 西門을 거쳐 북문이 있는 송악산 쪽으로 다시 연결되는 라인으로 구축된 토성土城이었다. 松都(개경)의 궁궐을 모방하여 새로 조성된 강도의 궁궐을 지키기 위해 1.2Km 둘레로 쌓은 궁성宮城인 것이다. (성곽 표시圖의 적색 점선 부분)




1232년에 천도하자마자 궁궐과 함께 축조한 이 궁성(내성)은 그러나 1259년 몽고와의 화의조건 때문에 쌓은 지 27년만에 허물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1270년 송도로 환도한 이후로는 한동안 잊혀진 성이 되었다가 조선시대로 넘어와 세종연간에 이 궁성 터에 石城을 다시 쌓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강화읍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성은 고려 강도시대의 궁성(내성) 자리에 쌓았으니 그 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1637년 병자호란 때 아쉽게도 또 파괴되고 만다. 이 후 강화가 왕조의 보장지처(保障之處)로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1652년(효종3년)부터 수축(修築)과 개축(改築)이 계속되는데 성곽의 규모와 위치를 놓고 오랬동안 논란을 거듭하지만 결국 기존의 궁성의 범위를 넘어 남산(花山)과 견자산까지 이어지는 라인으로 넓혀서 신문리와 국화리 일부를 포함한, 강화읍내 전체를 감싸는 읍성 형태로 둘레 약 7.2Km의 성곽이 1710년 (유수 민진원) 완공을 보게 된다. 이 성의 정확한 명칭은 '강화부성江華府城''이며 (명칭 문제는 아래 따로 언급)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1964년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고 일부가 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곽 표시圖의 청색 점선 부분)


당시의 중성은 1250년에 축조한 토성으로 창희문이 있던 옥림리 성문고개에서 시작하여 송악(북산)을 돌아 서쪽으로 용장고개를 지나 국화리 연화골 쪽으로 남산을 넘어 선행리, 찬우물 고개를 거쳐 태안문이 서있던 대문고개로 이어졌으며 다시 산 등을 따라 창리 현당산의 창성(倉城)에 이르는 약 12Km의 길이로 강도 전체를 둘러 싼 도성都城이다.이 성의 건설을 주도한 당시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항이 '병황도(屛皇都)'했다는 기록에서 보듯 황도를 병풍처럼 둘러쳤다는 뜻이니 중성은 강화황도 즉 江都를 둘러 싼 도성이었음을 말해주며 당시,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1만여 호를 수용했던 강도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성 역시 1259년에 파괴되었고 이 후로 다시 쌓은 적이 없는, 완전히 잊혀진 성이 되어 지금에 이른다. 다시 복원되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고 성터의 흔적이나 자료가 부족 하다. (성곽 표시圖의 회색 점선 부분)

 



2. '강화산성' 명칭의 문제

성자락의 일부가 북산이나 남산, 견자산을 지나가기 때문에 산성(山城)이라고 했을까? 산성이 아닌데 왜 산성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산성이던 평지성이던 명칭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할 지 모르지만 역사복원에 있어서, 명칭이나 용어부터 정확한 복원이 이루워져야 그 복원되는 실체의 성격과 의미가 명확히 규정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적 제132호로 지정될 당시(1964년) 실무자의 신고서 작성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 같은데 이후로는 행정적 근거에 의거 관행적으로 써왔겠지만 이제 고려시대의 유적으로 복원하겠다고 하는 마당에서는 반드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선 산성(山城)의 개념부터 살펴 보기로 하자.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고대로 부터 많은 산성을 축조하여 국토를 방어해 왔다. 만주에 있는 고구려의 오녀산성, 한강변의 아차산성, 한양도성의 입보처(入保處)인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권율장군이 대첩을 이룬 행주산성, 청주의 상당산성, 단양의 온달산성 등이 있고 김포에는 문수산성이, 강화에는 정족산성이 있다. 조선시대에 전국에 759개소의 성곽이 있었는데 이 중에 182곳이 산성이었다.(남한에만 1,200곳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많은 산성들을 접하다 보면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아하! 산성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느낌이 잡히게 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산성은 산에다 쌓는 성인 것이다. 오녀산성은 오녀산에, 아차산성은 아차산에,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문수산성은 문수산에, 정족산성은 정족산에 있다. 그러면 강화산성은 강화山에 있을까?

     

산성은 험준한 산지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곽으로 산봉우리를 둘러싸는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시켜 쌓는 포곡식(包谷式)이 있는데 일단 전쟁이 나서 적군이 몰려오면 인근의 모든 民.官.軍이 보따리를 싸들고 거주지를 떠나서 산성으로 들어가 난을 피하거나 항전하게 되는데 이와같은 入保전술은 淸野전술과 함께 적은 병력과 자원으로 넓은 땅을 방어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럼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후에 궁궐을 짓고 성을 쌍았는데 이 성들은 어떤 호칭의 성이 되어야 할까..

고려는 천도 후에 강화를 '강도江都'라고 불렀다. 수도라는 뜻의 도읍 都자가 들어간 江都는 '강화황도江華皇都'라는 의미를 함축시킨 명칭으로 천도한 1232년 부터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까지 38년 동안을 江都시대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이 때 궁궐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내성은 '江都宮城'이다. '고려는 황제국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그 수도가 황도皇都인 것은 당연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둘러쳐진 성은 '도성都城' 또는 '황성皇城'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중성은 '강도성江都城'이라고 해야 역사적 관점에 가장 부합하는 명칭이 되겠고 경우에 따라 '강화도성江華都城'이나 '강화황성江華皇城'이라 부르는 것도 가능한 범위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시절의 성은(성곽 표시圖의 청색 점선 부분)  '강화부성江華府城'이 정확한 명칭일 것이며 복원하겠다는 사적 132호 강화산성은 바로 '강화부성江華府城''인 것이다.



3. 글을 마치며

강화가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고려의 수도였었다는 사실을 자부심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강화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 유전자같은 것일 것이다. 고려시대 성곽을 복원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뜻깊고 기대가 되는 일이다. 당대에 길게는 27년, 짧게는 9년여 존재했던 城들이지만
宮城(내성)의 경우는 그 복원물이 18세기 초까지도 존속했던 것으로 사료상에 나타나고 있어서 이번 복원계획의 조준점은 여기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지역은 주거 밀집지역이기 때문에 해결하기 쉽지 않은 난제들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江都城(중성)의 경우는 파괴된 이후로 다시 쌓은 적이 없고 역사서에 몇줄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성터의 흔적이나 자료가 없어 복원하기에는 75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동쪽 해안가 윗쪽 적북돈에서부터 아랫쪽 초지돈까지 약 23㎞에 걸쳐 흙으로 제방처럼 쌓았던 外城은 1259년에 허물어 버린 이후 1691년(숙종 17년) 보장지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같은 자리에 돌로 다시 쌓기 시작했다. 1743년(영조 19년)에는 일부를 벽돌로 쌓았으나 지금은 해안도로 건설로 흔적마저 다 없어지고 오두돈대 부근에 1~200미터 정도의 벽돌 부분이 남아있어 사적 제452호로 지정되었다. 수원 화성과 더불어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강도시대의 대문호 이규보 선생이 "가서 구경할 만 하다"고 찬사를 보냈던 장관을 재현하기는 난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남아있는 성곽(소위 강화산성)을 조금 고쳐놓고 '고려성곽의 복원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사안의 핵심을 외면한 채 견강부회나 아전인수 하는 것이 아닐까?  선원사 복원같은 커다란 오류를 또 반복할까 걱정이 된다.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이 복원을 엉터리로 하는 바람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에서 탈락한 사실을 교훈으로 삼기 바란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복원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좀 더 진지한 단계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2007년 5월부터 11월까지 개성에서는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고려궁성을 발굴 조사했고 이후 3차에 걸쳐 조사가 진행됐다. 그 결과 40여 동의 건물지와 청자를 비롯한 8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그 결과를 '개성 고려궁성'이라는 시굴 조사 보고서를 통해 공개했다. 문화적 자부심이 충일했던 고려 황궁의 전모를 파악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한참 필요한 상황이니 문화재연구소는 북한과 협의해 2017년까지의 중·장기 계획안을 마련해 놓은 상태다.

문화재청과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앞으로도 고려궁성에 대한 연차적인 학술조사를 진행, 다양한 자료를 확보하여 고려궁성 및 도성제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고 하니 이를 예의주시하고 강화城의 복원계획에 연계해 나가야 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면 이 연구에 강도시대의 성들도 끼워넣어 함께 참여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강도는 송도(개경)의 축소 복사판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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