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돈 어루만지記 강화군 내가면 구주평(鳩洲坪) 한가운데 해안가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계룡돈(鷄龍墩)의 원경이다. 바다를 막은 제방이 돈대 양쪽으로 날개城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데 고려 말 간척이 되기 전엔 바닷물 위에 한 점 찍은 듯 떠있던 아주 작은 섬이었으리.. 이 돈대를 만들 당시의 원래 이름은 계룡성돈(鷄龍城墩)이다. 돈대名에 성(城)이라니.. 좀 의아스럽긴 한데, 돈대 자체가 작은 성채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오래 전부터 구주평과 망월평의 제방을 성둑 혹은 만리장성둑으로 불러왔고 그 라인에 놓여진 돈대이니 城이라고 한 작명이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계룡돈의 출입구이다. 맞은짝에 포좌(砲座)가 하나 보이고 바다를 향해 뚫려있는 포혈(砲穴)이 선명하다. 불랑기포(佛狼機砲) 4호, 5호 이외 다..
돈대界의 얼짱 후애돈(後崖墩)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있는 후애돈(後崖墩)은 강화 52개 돈대 중에서 아주 잘 생긴 돈대이며 양사면에 있는 작성돈과 함께 돈대의 원형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돈대이다. 원래 명칭은 길상후애돈(吉祥後崖墩)인데 초기에 좀 쓰다가 긴게 불편하니까 줄여서 후애돈이 됐다. '길상산 뒤쪽 언덕'이란 뜻인데 이곳 동네 이름도 '산뒤마을'이잖은가.. 이 마을 어른들의 거짓말(?) 지혜가 후애돈을 이만큼 보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돈대는 우리마을의 수호신이다! 이걸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자에게는 큰 재앙이 닥칠 것이다!!!" 체성(體城)위에 여장(女牆)까지 제대로 갖춰진 돈대가 드문데 후애돈은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동막 옆에 있는 미곶돈과 함께 오리지날 여장이 일부 ..
146년 전 초지진의 모습과 지금은? 초지진 정문 모습이다. 사진과 같은 외삼문(外三門)은 당시 모든 관공서의 전형적인 정문 양식이다. 초지진(草芝鎭)은 요즘식으로 표현한다면 '초지경비부대'쯤 될 것이니 위병소가 있고 면회실도 있는 요즘 군부대의 정문과 같은 곳이다. 다만 사진에서는 점령군 미군이 보초를 서고 있다. 미해군 장교 두 명이 전리품인 깃대와 전립을 들고 부대 앞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 모습인데 이 시절의 카메라는 노출을 5초 이상 해줘야 했기 때문에 저들은 사진사의 연출에 따라 걷는 모양처럼 포즈를 취하고 서있는 것이다. 저 미군들 뒤쪽으로 소로를 따라 120m쯤 가면 초지墩이 나온다. 현재 사적 225호로 지정된 초지鎭은 초지부대의 해안경비초소 중 하나였던 초지墩만을 달랑 복원해 놓고는 이것..
이때의 사진 작법은 젖은 유리판에 화상을 담는 "콜로디온 습판법" 이었다. 펠리스 비토가 미해군 사진반과 함께 찍은 신미양요 사진들은 유리판에 감광유제인 콜로디온(collodion) 용액을 바른 뒤 여기에다 화상을 담아내는 "콜로디언 습판법"에 의해 탄생했다. 19세기 중반에 발명된 이후 기존의 방식보다 더 높은 선명도와 복제성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사진제작 기술이다. 문제는 유리판에 바른 콜로디온 용액이 마르기 전 축축한 상태에서 촬영과 현상, 정착 과정을 끝내야만 했기에 완전한 암실이 바로 옆에 있어야만 했다. 이 사진작법을 이용해 작품활동을 하는 콜로디온 습판법 전문 사진작가가 지금도 우리나라에 몇 명 있어 가끔씩 전시회도 열리곤 한다. 복잡한 준비과정과 촬영의 시급성, 5~10초에 달하는 노출시간,..
사진으로 읽는 朝美전쟁(신미양요1871) -上 1871년 6월이었으니까 2017년 6월인 지금으로부터 146년 전에 우리는 강화도에서 미국과 전쟁을 치른 적이 있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5년 전에 발생한 제너럴 셔먼號 사건에 대한 응징과 통상을 목적으로 쳐들어 와 시작된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美함대가 우리 해역에 진입한 1871년 5월19일부터 淸나라 지푸항으로 퇴각한 7월3일까지 46일 동안의 전쟁이었는데 6월10일~12일 2박3일간 미군 651명이 초지진 쪽으로 상륙하여 벌인 광성보전투가 이 전쟁의 하이라이트이다. 우리가 대패한 이 전투에 대한 우리의 기록은 별 것이 없는데 미군 쪽에는 해군장관에게 보내는 함대사령관의 공식 보고서, 상륙작전계획서, 작전에 참가했던 해병대 장교의 원정보고서..
甲比古次의 의미와 역사 강화도(江華島)를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지명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甲比古次'이다. 많은 관련 학자들이 얘기 하듯이 甲比古次는 "움푹 들어간 곳의 입구"라는 뜻을 가진 고구려 지명 '갑구지'를 한자의 音으로 표기한 것이다. 삼국시대에 강화도 지역의 패권이 백제 고구려 신라로 이동하였는데, 신라 경덕왕(742∼765) 때의 한화(漢化)정책 이후 이 갑비고차를 뜻으로 푼 한자 '해구(海口)', '혈구(穴口)'로 바꿔 쓰기도 했고 나중에 축약형으로 변한 갑곶(甲串)이 등장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한반도 지도를 보면 서해 쪽 한 가운데에 움푹 들어간 강화만(江華灣)이 보인다. 여기에는 예성강, 한강, 임진강의 입구가 한 데 모여 바다로 향하고 있는데 그 앞을 커다란 방패처럼 가로..
이 사진은 서기1900년에 준공된 성공회 강화성당(사적 424호)의 1906년 모습입니다. 100년도 더 지났지만 저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이 특히 강화읍 사람들에겐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여름철인지 앞에 네짝의 여닫이 문을 모두 떼어 놓았구요 왼쪽 옆마당에 아람드리로 치솟은 회화나무는 아직 자라기 전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사이로 송악산(북산) 기슭에 있는 강화유수부 동헌인 명위헌(明威軒)이 보이고 그 옆에는 지금은 없는 전각 하나가 현재 군립도서관 자리쯤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1889년 11월, 조선교구 설립을 목적으로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영국 웨스트 민스터 대성당에서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1890년 9월 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과..
강화도의 대표적인 국방유적지인 갑곶돈지(甲串墩址)와 초지돈(草芝墩), 광성돈(廣城墩) 그리고 남장포대(南障砲臺)에는 홍이포(紅夷砲)라는 대형화포가 전시되어 있는데 대부분 모조품, 복제품이다. 유일하게 초지돈에 전시되어 있는 1門이 진품이라고 하는데 그 출처와 제작년도가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 돈대를 복원하면서 그 시대에 사용했던 무기를 같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볼거리 제공 차원을 넘어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고증이 제대로 안됐거나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역사적 실체에 큰 손상을 주게 된다. 갑곶돈지에 전시된 홍이포의 설명판을 보면 도대체 이 홍이포는 언제 누가 만든 무기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왜 강화도 국방유적지에 전시해 놓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