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신미양요 당시의 광성보 전투가 올 9월20일 재현된다는 기사를 보고, 전부터 이런 재현행사를 주장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자료를 찾아보니 2002년에 이미 이런 행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위의 사진이 당시의 모습인데 강화의 덕신고등학교 학생들이 재현배우 역할을 했다. 처음 시도된 郡 차원의 작은 행사라서 어린 학생들의 애로가 많았을 걸로 짐작이 되는데 2009년 행사는 인천시에서 진행하고 사극전문 배우까지 동원한다고 하니 규모나 내용면에서 훨씬 짜임새가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아울러 재대로 된 고증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몇가지 오류가 눈에 띄는 2002년 사진을 보면서 당시의 조선군과 미군의 모습을 되짚어 보기로 한다. 어재연 장군은 두정갑(頭釘甲) 을 입고 전투를 지휘했을까? 위 사진은..
한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 여러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온 곳임을 암시한다. 갑비고치, 혈구, 해구, 열구, 강주, 강도, 심주, 심도 등으로 불렸던 강화가 그렇다. 이 중에서 '강도'와 '심도'는 지금까지도 쓰이는 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강화로 옮겼던 전시수도 강도(江都)는 교과서에도 나오고 특히 강화사람들이 자랑스러워 하며 자주 쓰는 별칭이다. 임시수도이지만 일국의 수도였던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않고 기껏 자료를 찾아봐야 '강화의 옛이름' 정도의 답밖에 안나오는 또다른 별칭 심도(沁都)에 눈길을 돌려 보고자 한다. 심도파출소, 심도직물, 심도중학교 등을 보며, 들으며 성장하던 학창시절부터 품었..
강화역사관 제4전시실에 가면 연무당(鍊武堂)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데 열무당(閱武堂) 사진을 붙여놓고 연무당이라고 설명을 해놨다. 역사적으로는 연무당이 많이 알려져있는데 사진은 열무당의 것밖에 없으니 이 둘을 그냥 조합해 놓은 것일까? 사실 연무당과 열무당은 명칭도 비슷하고 같은 용도를 가진 건물이라 헷갈리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강화에서, 그것도 역사관에서 마저 이것을 혼동한다면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이를 바로 잡아줄 곳은 없을 것이란 생각에 이 두 유적지에 대한 확실한 구분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연무당이나 열무당 둘 다 군대 연병장이나 학교 운동장에 서있는 사열대(査閱臺)로 보면 된다. 지금이야 거의 콘크리트로 짓지만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전통 건축양식인 기와집으로 짓고 당호(堂號)를 붙여 놓았다. 열..
황포돛대를 달고 유유히 강화도 앞바다를 항해하는 조선시대 조운선의 모습입니다. 이 배의 항해로를 따라가 보면.. 삼남지방의 세곡(稅穀)을 싣고 강화해협의 좁은 수로를 지나 연미정이 보이는 뱀섬 앞에서 우회전하여 한강으로 접어듭니다. 조금가다 좌회전하면 임진강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그대로 직진하여 西江(이 동네에 서강대학교가 있죠..)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 있는 廣興倉(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이 있죠..) 에다 漕運米를 부려놓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옵니다. 위 황포돛단배 사진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해군 조선원정함대에 종군 중이던 사진작가 펠리스 비토(Felice Beato) 가 찍은 것인데 세곡 수송의 임무를 마치고 아랫녘 고향으로 가기 위해 막 강화해협을 빠져나와 동검도 앞 넓은 바다로 진입..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엔싸이버 백과에 나와있는 염하(鹽河)에 대한 설명의 일부이다. 그러나 백과사전인데도 정확한 어원이나 유래에 대한 언급은 없고 "마치 강과 같다하여 염하라고 부른다"라는 막연한 설명이 있을 뿐이다. 요즘 각종 매스콤의 강화도 관련 기사나 여행기같은 곳에 심심치 않게 이 '염하'라는 별칭이 등장하는데 예전엔 흔치 않았던 일로 어디서 보고 인용하는지 궁금하다. 정보검색과 공유가 쉬워진 인터넷 덕분일까?.. 서해 바닷물은 어디나 다 짜다. 1920년대, 초지 쪽에 염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특출나게 여기에만 소금 염(鹽)자를 쓸 ..
204대 강화유수 이의익 1627년 1월, 만주에서 3만의 후금軍이 쳐내려 오자 인조임금은 강화로 피신합니다.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던 조선은 두 달 후 정묘조약을 체결하고 끝낸 이 정묘호란을 계기로 보장지처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된 강화를 강화유수부로 승격시킵니다. 지금의 국장급인 종3품 도호부사가 차관급인 종2품 유수로 격상되면서 강화의 방비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 이 해에 임명된 초대 유수 鄭孝成으로부터 1895년(고종32년) 마지막 유수 申正熙까지 268년간 237명의 유수가 강화를 거쳐갔습니다. 이 중 오늘 소개할 분이 204대 강화유수 이의익(李宜翼)입니다. 사모관대를 하고 고급 나무의자에 앉아 45도 얼짱각도로 위엄과 기품과 예우가 엿보이는 독사진을 찍은 이 분이 1857년에 강화유..
최근에 '강화산성 복원계획'이 메스콤을 통해 발표가 됐다. 고려시대,그러니까 몽고가 침입하여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했을 당시(1232년) 강화읍에 축성되었던 성을 복원한다는 계획인데 특히 남한지역 유일의 고려유적의 복원이라는 콘셉이 눈길을 끈다. 강화군은 "계획에 따라 2009년에 9억원을 투입해 성곽 및 남장대 복원을 시작으로 오는 2012년까지 연차별로 총 600억원의 예산을 들여 강화산성을 고려궁 수비성곽으로 복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는데 이 계획에는 꼭 짚어봐야 할 문제점들이 있어 여기에 제시한다 . 1. 강화산성은 고려성이 맞나? 강화산성을 고려궁 수비성곽으로 복원한다고 했는데 17세기 당시 조선왕조의 방어전략과 개념에 입각해서 신축된 조선시대의 성을 강도시대의 고려궁성이라고 하기에는 문..
19세기 중엽에 그린 강화부내 지도인데요 이 지도를 따라 그 시절의 강화읍내를 한바퀴 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도 맨 위에 있는 上營은 상아(上衙)라고도 표기하는 강화유수의 집무처인 강화유수부 동헌입니다.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이 있는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강화군청으로도 사용했던 곳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옆에는 객사(客舍)가 있는데 조선시대 지방관아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관청입니다. 객사(客舍)라는 명칭에서 보듯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곳이지만 건물 중앙의 정전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고, 지방 고관이 부임하면 먼저 이 곳에 들러 배례를 올리던 곳입니다. 해구보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