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이포의 보유와 강화도 배치 1653년(효종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장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號가 제주도 해안에서 난파되어 헨드릭 하멜을 비롯한 36명의 네델란드人이 표류해 온다. 이 난파선에는 30문의 홍이포가 탑재되어 있었는데 이 중 일부를 건져 올렸다고 하멜은 표류기에 써 놓았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기록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 현종 5년(1664년) 6월 22일 4번째 기사 '강도 어사 민유중이 강화도의 미곡과 군기의 숫자를 아뢰는' 장면이 그것이다. 월곶(月串), 제물(濟物), 용진(龍津), 초지(草芝), 광성(廣城), 사각(史閣), 승천(昇天), 인화(寅火) 등의 각 보에 나누어 둔 것은, 흑각궁(黑角弓) 1천 3백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목궁 1백 50..
갑곶돈이 돈대가 아니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전적지 보수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된 갑곶돈은 40여 년 가까운 세월동안 전국의 수많은 관광객과, 각지의 학생들이 역사체험, 현장학습 등의 이름으로 다녀간 강화도의 국방유적 중 첫번째 가는 코스이다! 이 사진이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사적 제306호 갑곶돈의 모습이다. 해안 돌출부에 벽돌로 쌓은 치첩(雉堞)이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처져 있고 그 앞에는 소포(小砲) 1문과 불랑기포(佛狼機砲) 1문이 전시되어 있어 조선시대 돈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나 이곳은 돈대가 아니다. 현재 강화도에 있는 52개의 돈대 중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거나 복원..
◈ 놀라운 비석 강화대교를 건너자 마자 좌회전(U턴)해서 조금 들어가면 오른쪽에 舊 강화역사관이 있고 왼쪽으로는 舊 강화대교와 연결되는 대로변 일대의 진해마을이 나온다. 그 초입에 커다란 비석이 서있어서 다가가 자세히 보니 "병인양요 강계포수 전첩 기념비 (丙寅洋搖江界砲手戰捷紀念碑)"이다. 순간 필자는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첫번째는 "강계포수 전첩 기념비라는 것이 왜 강화 땅에 서있는가?" 이고, 두번째는 1990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존재를 24년이 지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던 본인의 寡聞함 때문이다. ◈ 강계포수(江界砲手) "조선 3대 색향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강계는 남남북녀라는 용어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명포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도 강계였으니, 조선시대에는 ‘강계포수’ 하..
위 사진은 몇 년 전부터 인터넷에 출처 불명으로 떠돌던 사진인데 처음 보는 순간, 강화도에 산재해 있는 여러 돈대 중 한 곳의 오래 전 사진이구나.. 라는 느낌을 직감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강화출신인 필자도 어느 돈대라고 꼭 집어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낯 선 곳이었습니다. 인터넷의 한 밀리터리 사이트(http://panzercho.egloos.com/2765527)에서는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 점령당한 강화도 초지진의 포대지의 모습으로 포대 성곽의 높이는 대략 3미터 정도 됩니다."라는 설명을 붙여 놨더군요. 그러나 초지돈은 워낙 잘 알려진 돈대이기 때문에 이곳이 초지돈이나 초지진 남쪽에 있던 진남포대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강화사람들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저곳은 초지진 일대의 지형이 전..
이 사진은 강화읍 고려궁지 안에 있는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동헌의 118년 전 모습이다.(2012년 기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에 교관으로 초빙된 영국의 예비역 해군대위 콜웰(Callwell)이 1894년 6월에 촬영한 사진으로, 월간지 모닝캄(The Morning Calm) 1899년 2월호에 게재했던 귀중한 사진자료이다. 갑고지 바닷가에 세웠던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은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으로도 불렸는데 이 사진을 찍은 직후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학당은 몇 달 뒤에 폐교됐다. 모닝캄誌는 1890년 7월에 창간하여 1939년 10월에 폐간한 영문잡지로 영국 성공회 조선 선교본부가 본국에 매월 한 차례씩 보내는 선교보고서 역할을 하던 잡지였다. 종교誌였지만 19세기 ..
살채 유적지 (강화군청 주차장 부지) 발굴 현황 * 이 글은 살채 유적지 발굴 현장 바로 곁에 살고있는 죽마고우 이현일이 페이스북과 강화사랑 홈페이지에 게재한 내용인데 여기다 全載합니다. 사진1 (사라진 강화도 살채터에서 별효사청 동영으로 추정되는 발굴현장) 강화군청 주차장으로 쓰기 위해 살채(살창리) 일부를 철거하고, 문화재법에 따라 문화재 조사를 하고 있는 현장을 지난 봄에 공개한 바 있는데 최근 전체 윤곽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유적지 전체 규모가 들어나 그 일부를 추가 공개합니다. 비공개인 현장을 공개하는 이유는 일부 유적지 발굴이 정치적 또는 경제적 가치 등의 이유로 현장을 덮는 예가 빈번해 발굴로 들어난 유적지 흔적의 중요도를 감안, 주민의 일원으로 공론화 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쓰이길 원하는 ..
강화읍내의 북산(일명 松岳山) 중턱에는 고려 강도(江都)시대의 궁궐지가 있다. 서기1232년, 몽고군이 침략하자 고종과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가 수도를 옮기고 39년 동안 버텨낸 항몽의 근거지가 바로 여기인데 이 일대 2,279평을 사적133호 고려궁지로 지정해 놓고있다. 남한 유일의 고려시대 유적지라는 이곳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은 고려시대 궁궐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을까 하고 900원짜리 고려궁지 입장권을 끊어 들어와 보지만 당시의 유적은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두어 채의 전각이 보여 달려가 보지만 어리둥절하게도 이는 조선시대 건물들이다. 강화유수의 집무실인 명위헌(明威軒)과 이방의 집무처라는 이방청(吏房廳)이 그것인데 이 두 건물은 사실 최근까지도 유적 대접을 받지 못한 채 군청 청사..
고려내성(궁성)의 정남문인 승평문이 있던 자리에서 판당 추정지 탐방을 시작합니다. 선원 김상용 선생이 병자호란 때 자폭했던 남문자리도 여기입니다만 이 때의 城은 다른 성으로 조선 전기, 세종 때 쌓은 강화도호부성입니다. 그리고 현재 강화산성이라 칭하며 부분복원 중에 있는 성은 숙종 때인 1710년에 쌓은 강화유수부성이고 이 성의 남문(안파루)은 옛날 강화극장 앞에 있죠..집중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쉬운 부분입니다. 고려내성 당시의 서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왔습니다. 사진 중앙의 산 밑으로 강화여고 신축교사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성광교회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살짝 보이는군요. 고려사 기록을 보면 壬午 幸城西門外大藏經板堂, 率百官行香라는 팔만대장경의 완성을 자축하는 행사(慶讚會) 내용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는 西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