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 백마 탄 기사(騎士 Knight)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제주 산 공골마(公骨馬)를 탄 효사(驍士)가 있었다. 별효사(別驍士)는 날랠 驍자에 Special의 의미를 가진 別자가 붙은 명칭의 기마병종으로 정조대왕 때 생겨 19세기 말까지 존재했던 특수부대원이다. 파총이 지휘하는 사(司)나 천총이 지휘하는 부(部)에 소속되지 않고 더 상급부대인 영(營)에 소속된 직할부대로, 중군이 지휘하는 강화 진무영에도 201명이 편제되었던 요즘의 특수기동대(特殊機動隊)라고 보면 되겠다. 별효사는 매년 무사선발시험인 도시(都試)를 통해 선발되는데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으로 지금의 부사관 정도의 신분이 되겠다. 1876년(고종13년)에 찍힌 강화읍 성내(城內) 사진의 별효사청 東營은 특이하게 건물들을 사각형으로 배치..
문화재청이 문화재청 발족 50주년과 초조 대장경 판각이 시작된지 천 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 11월15일 부터 12월1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천 년의 기록, 내일을 열다"란 주제로 특별 전시회를 개최했다. 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우수한 기록문화유산이자 귀중한 불교문화 유산인 초조 대장경과 재조 대장경 중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대장경이 대거 출품되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대장경을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는 자리였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한역 대장경인 초조 대장경의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우리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마련된 전시회였다. 필자는 전시회 폐회가 임박한 12월 15일에야 부랴부랴 이 위대한 조상들의 업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재조 ..
유적의 얼굴 - 안내판 어떤 유적이든지 그 유적 앞에 서있는 안내판만큼 그 유적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자료는 없다고 본다. 또 그래야 하고 사람들은 또 그렇게 믿고 있다. 탐방객이 유적 현지를 직접 찾아가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문헌자료나 인터넷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현지에서만 접할 수 있는 정확하고 깊이있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내판의 중요성이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간 그들에 의해서 전파되는 유적의 안내문은 잘 발달된 각종 매체를 통해 사통팔달 퍼져나갈 뿐 아니라 정보 재생산의 원본이 되고 근거자료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적 안내문은 역사적 근거에 의한 충실한 내용과 함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되고 이해될수 있는 스토리 구성과 정확한 표현에 신경을 써..
'강화산성'이 정말 山城인가? ■ 개요 강화산성 시리즈 上편에서는 강화산성의 잘못된 족보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이번에는 이 성의 이름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언급했듯이 강화산성은 1710년에 축성된 강화유수부성(江華留守府城)을 가리킨다. 이 정식 명칭을 나두고 왜 강화산성이라고 부를까? 조선시대 4대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근거 불명확한 강화산성이라는 이름이 도대체 언제부터 사용되어 온 것일까? 강화산성이 山城일 수 없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우선 산성의 개념부터 살펴 보기로 한다. ■ 우리나라의 산성은?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고대로 부터 많은 산성을 축조하여 국토를 방어해 왔다. 산성은 험준한 산지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곽으로 산봉우리를 둘러싸..
시대적 착오로 오염된 강화산성 강화에는 좀 유별난 집착이 하나 있다. 있는 조선시대 놔두고 없는 고려시대를 자꾸 내세우려 하는 것이 그것인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강화의 대표 유적 '강화산성'이다. 이 성은 지금으로부터 딱 300년 전 조선 숙종 때인 1710년에 쌓은 성인데 여기에다 자꾸 '고려'라는 포장지를 씌워 보려고 애쓰는 형국이어서 역사 왜곡을 지적하기에 앞서 안스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조선시대 4대史書라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을 조금만 들여다 봐도 답이 명확히 나오는데 이걸 소홀히 하고 있다. 지금 당장 '강화산성'을 인터넷 검색창에 집어 넣어 나오는 검색 결과를 한번 보시라. 몽고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쌓은 고려시대 성으로 왜곡된 기사가 웹상에서 무한증식하고 있다..
1901년 강화 진위대가 사용하던 화승총 제작시기가 대한제국시대로 확정된 최초의 화승총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박물관은 일본 이바라키현 미토시에 사는 재일교포 사업가 이석조(일본이름 기모토 토시오. 70)씨가 화승총 1점(길이 138cm)을 기증했다고 4일 밝혔다. 이 총에는 격납 장소가 강화도 무기고이며, 격납 시기는 1901년임을 밝혀주는 묵서(墨書) 명문과 함께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紋章)인 오얏꽃 장식이 있다고 박물관은 설명했다.박물관은 이 화승총이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쇠로 만든 총렬에 '武'(무)라는 한자를 황동으로 감입(새겨넣음)한 점 등 다른 화승총에는 보이지 않는 중요한 특징도 있다고 덧붙였다. 나무로 만든 총신에서는 "신축년에 강화의 무기고 고쳐 만들며 격납했다"(辛丑改..
이 한 장의 오래된 사진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위 사진은 1876년에 찍힌 강화 진무영(鎭撫營)의 전경인데 한가운데 열무당(閱武堂)의 모습이 보입니다. 뒷쪽에는 13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보이는 북산의 능선이 눈에 정겹고 오른쪽에는 내성(內城) 줄기 일부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 밑으로 보이는 현 강화초등학교 자리에는 세곡(稅穀)을 쌓아두는 사창(司倉)과 진무영 운영비로 쓰이는 포량미(砲糧米)를 보관해 두었던 포량창(砲糧倉)이 길게 서있습니다. 열무당 앞쪽으로는 넓은 연병장이 보이는데 여기가 나중에 강화 上시장이 되는 자리입니다. 진무영은 조선 숙종때부터 수도권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에 주둔했던 군부대인데 지금 식으로 말하면 '강화해역경비사령부(江華海域警備司令部)' 쯤 되겠습니다. 당시..
전편에 이어 광성보 전투 당시 미군들의 모습을 살펴 보겠다. 위 사진은 초지진 상륙을 앞두고 전함 모노카시號 선수갑판에 128명의 미해군 육전대 1개중대가 도열해 기념촬영을 한 모습이다. Civil War라고 불리는 남북전쟁을 치르고 불과 6년 정도 지난 시점이니 장교나 하사관, 그리고 고참병사들은 전투경험이 무척 많았으리라 보는데, 사진으로도 자신감이 넘치는 그런 면이 엿보인다. 2002년 행사사진을 보면 미해군 육전대의 군복 색깔을 검정색으로 재현했는데 위 사진같은 흑백사진을 재현자료로 삼았다면 당연히 검정색으로 밖에 안보이겠지만 이 당시 미해군복의 색상은 짙은 청색, Dark Blue였다. 모자도 베레모로 재현을 했는데 해군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Sennet Hats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나온 궁여지책..